리더쉽 – 학교에서라도 좀 가르치면 좋겠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가서 전기및 컴퓨터공학 석사 과정에 막 입학 했을 때 였다. 학교에서 신입 대학원생들을 모두 불러 저녁 만찬행사를 열어주었다. 그때 학과장 교수님이 나와서 축사 비슷한 것을 해주셨다. 난 그저 한국에서처럼 높은 분이 나와서 인사치레 말만 하시겠지라고 짐작했는데, 의외로 인상깊은 말을 해주셔서 15년도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다 잊어버렸고, 이 말 한마디만 기억난다.

“I want you to be a leader in your field, whatever you pursue.” (여러분이 무엇을 추구하던간에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리더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만 귀에 따갑게 듣고 자란 나로서는 사실 약간 충격이였다. 당시 공부 정말 열심히 할 각오로 유학나왔던터라 학교 수업과 연구외에는 다른 생각이 별로 없던 시절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보고 앞으로 리더가 되라니… 물론 나한테만 한 이야기는 아니고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이였지만 신선한 충격이였다. 나름 한국에서 고등교육 코스를 밟아 왔지만, 어느 누구도 나보고 ‘리더가 되어라’ 혹은 ‘리더의 꿈을 키워라’ 라고 말해준 사람이 내 기억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냥 나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라는 말만 반복했고, 난 사실 그 말에 충실히 따른 범생이였다. 나는 ‘리더’는 ‘높은 분’ 혹은 ‘우두머리’의 영어식 표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 개념도 몰랐던 것 같고, 높은 위치는 열심히 노력하다가 나이 먹고 운 좋으면(?) 얻는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흐른후에 MBA를 가게 되었는데, 여기선 본격적으로 리더쉽에 관한 교육을 많이 받았다. 리더쉽에 관한 토론식 수업도 있었고, 리더로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법에 관한 수업도 있었으며 (둘다 필수 과목), 1학년이 끝날때쯤엔 자신의 리더쉽 스타일을 고찰하는 장문의 에세이도 써야했다. 수업이외에 리더쉽 관련 트레이닝도 많았는데 산악지역이나 남극같은 곳에 떼지어 여행하며 하루에 한명씩 돌아가며 그룹 리더역할을 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나는 칠레의 열대우림 지역인 파타고니아에서 밥해먹고 텐트치고 자면서 열흘간 돌아다니는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이런 리더쉽 교육에 관해 MBA내에서도 그 효용성에 관해 논란이 많았다. 리더쉽 교육 무용론의 대표적인 주장은 ‘리더쉽은 교실에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리더쉽은 실제 역할을 맡고 부딪혀 보면서 길러지는 것이지 교실에서 이론으로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한때는 이런 주장이 맞다고 생각했다. 특히 리더쉽 수업이 상당히 짜증나는 과목이였고 장문의 에세이는 정말 고역이여서 ‘이런다고 리더쉽이 길러지나?’ 라는 불평을 친구들에게 늘어놨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저런 리더쉽 교육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금도 리더쉽 스킬을 교실에서 기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어떤 리더가 바람직한 모습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많았다.  여러 훌륭한 리더들의 케이스 스터디나 비디오를 보면서 영감을 얻었던 때도 있었고, 리더라는 사람이 꼭 높은 위치(포지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꼭 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형 웅변가일 필요도 없다는 것도 어느정도 깨달았다. 무엇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혹시 미래에 어딘가에서 리더가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향후 리더를 평가해야 한다면 어떤 잣대를 사용할 것인가 등을 생각해 본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대학을 갓 졸업했을때는 리더쉽에 관한 생각이 완전 황무지였다면, MBA 교육과정을 거치고 나서는 주위의 작은 일상에도 리더쉽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경우가 많았다. 리더쉽 스킬은 실전에서 길러지겠지만, 적어도 바람직한 리더쉽에 대한 생각의 프레임은 교육이나 독서가 가르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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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일어난 가슴아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한국에서 리더쉽 부재에 관한 논란이 많다. 선원과 선장, 선박회사, 언론, 구조 기관, 정부등 혼란스런 상황에서 다들 책임전가에만 급급한 모습이지 내가 기대했던 ‘리더’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기 어려웠다 (예외: 손석희 사장). 그 중에서도 재난 구조의 총 지휘와 책임을 맡은 사람이 어느 기관의 누구인지조차 모호한 상태에서 우왕좌왕했던 정부의 모습은 정말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였다.

우리 주위에는 어렸을때 줄반장부터 과장, 차장, 부장, 팀장, 사장, 회장등 각종 ‘장’들이 많지만, 역설적으로 책임지고 이끌어주는 리더를 찾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반 회사든 정부 기관이든 어디를 가더라도 크고 작은 조직에는 리더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이번 사태를 보고 미루어 짐작컨대 세상에는 리더쉽 의식이나 고민같은 것 한번 없이 어찌어찌 하다가 리더 역할을 해야하는 자리에 앉게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점은 외국도 마찬가지일 것). 이런 현실이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리더쉽 함양교육을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바람직한 리더상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라도 주었으면 좋겠다. 리더쉽 교육은 꼭 리더가 될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바람직한 리더상을 정립하는 것은 훌륭한 리더를 뽑고 평가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커리어 상담 4 – TOP 모델

오늘은 커리어 상담 글 4번째로 TOP 모델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려한다. 제목을 쓰고 보니 무슨 패션쇼에 나오는 수퍼모델에 관한게 아닐까 하는 오해를 하기 쉬운데,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그런것과는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TOP 모델은 T – Talent , O – Organization, P – Passion 의 첫글자를 따와서 기억하기 쉽게 붙인 것이다. 물론 내가 만든 모델은 아니고, 예전에 회사에서 교육받을때 어디선가 들었는데 출처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 핵심 메시지는 기억하고 있어서 공유해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적인 커리어는 이 세가지가 조화될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자.

career top model

Talent (재능) – 이건 ‘내가 남보다 잘하는게 뭔가’에 관한 것이다. 뭔가를 정말 정말 잘 하는 사람을 보면 피나는 노력의 성과이기도 하지만 ‘캬~ 정말 타고 났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될때가 많다. 모짜르트의 음악적 재능이나 마이클 조던의 동물적인 슛감각등을 연상하면 된다. 명석한 두뇌나 예술적 재능과 같은 축복은 물론, 활발한 성격이나 친화력등 기질에 관한 것도 이에 속한다. 이렇게 말하면 선천적인 것만 생각할 수 있지만, 때로는 본인이 노력하다가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게 되는 때도 많다. 살다가 자신도 몰랐던 능력을 발견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모든 사람이 스티브 잡스같은 천재일 수는 없겠지만, 성공적인 커리어를 위해 재능이란 요소가 어느정도 뒷받침이 되어야함은 부인할 수 없다. 내 주위에 골프에 대한 열정은 선수 못지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이 골프를 커리어로 택해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Passion (열정) – 이건 ‘내가 뭘 좋아하는가, 뭐가 하고 싶은가’에 관한 것이다. 열정은 두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이 재능만 가지고는 큰 성공을 이루기 어렵다. 스포츠 영웅이라고 불리는 선수들은 뛰어난 재능에 엄청난 연습량을 소화해 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인내의 시간을 이겨내려면 그만한 열정이 없으면 힘들다. 또 열정이 중요한 것은 본인의 행복과도 직결된다. 일에 열정이 있는 사람은 일하는 것 그자체가 즐겁다. 일이 더이상 일이 아닌 것이다. ‘뛰는 놈위에 나는 놈있다’ 는 말이 있던가. 난 ‘나는 놈 위에 즐기는 놈’ 있다고 말하고 싶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결국 자아성취나 본인의 행복추구라는 면에서 생각해 보면 ‘열정’은 정말 중요한 요소다.

Organization (조직) – 이건 ‘내가 속한 조직이 어떤 도움을 주는가’에 관한 문제다. 재능과 열정을 겸비한 인재가 마음껏 나래를 펼수 있도록 회사가 여러 지원과 기회를 주는 것은 개인과 회사의 성공에 아주 중요하다. 전 구글 CEO 였던 에릭 슈미트가 쉐릴 샌드버그에게 한 말이라고 해서 유명해진 ‘로켓에 자리가 나면 일단 올라타라‘ 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급성장하는 회사에서는 그만큼 개인적 커리어 성장의 기회도 많기 때문이다 (이건 ‘묻어간다’와는 다른 의미이다). 암튼 성공적인 커리어라는 주제를 생각해 볼때 자신이 속한 팀이나 회사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망해가는 회사나 개인적 발전의 기회가 없는 직장에서 만족스런 커리어 빌딩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눈치챘겠지만, Organization 이란 요소의 특징중 하나는 이직 혹은 사내이동등을 통해 바꾸는게 가능하다 (반면 Talent나 Passion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결론은 — 위의 세가지 요소가 맞물린 교집합의 영역에서 성공적인 커리어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만약 본인이 위의 세가지를 모두 갖추었다면 그 사람은 정말 행운아일 것이다. 본인에게 부족한게 있다면 무엇인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한 번 돌아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한가지 사족 —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 입시 위주 교육의 가장 큰 폐해는 아이들이 자신의 Talent와 Passion을 모른채 20살이 된다는 것이고, 대학교를 졸업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엉뚱한 Organization에 조인한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재봉틀

나에게는 연로하신 부모님이 있다. 역경의 세월을 이기고 자식 셋을 키우셨지만, 나를 비롯 세명 모두 외국에 나가 있어서 두 분만 한국에 계신다. 아직은 다른 사람 도움을 많이 받지 않으시고 살고 계시지만, 매번 찾아뵐 때마다 조금씩 부모님이 노쇠해지신 것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특히 어머니는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파킨슨병 증세때문에 거동이 많이 불편하시다. 손떨림 증상이 예전엔 다른 사람 눈에 잘 띠지 않을정도로 미미했지만, 오늘보니 확연히 손을 떨고 계셔서 깜짝 놀랬다. 이제 어떤 때는 걸음 걸이도 생각대로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니 울컥한 마음만 앞선다.

부모님 집에는 아주 오래된 Singer 재봉틀이 있다. 어머니도 할머니께 물려 받은 것인데 아마 100년도 넘은 것 같다. 아직도 잘 작동하고 가끔 어머니가 쓰시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에도 Singer는 ‘명품’ 재봉틀이였고 할머니의 재산 목록 1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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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 재봉틀을 할머니가 도대체 어떻게 들고 피난 나오셨을까가 궁금해졌다. 어머니쪽 집안은 평안도에서 격변의 세월동안 월남하셨다. 이삿짐을 부친것도 아니고 용달차도 없었을테니 도대체 저 무거운 재봉틀을 어떻게 들고 내려오셨을까? 궁금해서 어머니께 물어보니 할머니가 본체만 머리에 이고 내려오셨단다 (나무 책상은 나중에 따로 구입하신듯). 본체만의 무게도 상당하다. 이게 요새 재봉틀 같은 플라스틱이 아니다. 그냥 쇳덩이 무게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할머니가 이렇게 무거운걸 머리에 이고 걸어서 그 먼길을 오셨다는게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도 젖먹이 아이 (막내이모) 하나를 업고, 코흘리개 아이 하나 (4째이모) 는 한손에 잡고 말이다.

재봉틀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1948년에 월남하신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2년전이니 남북은 38선으로 갈려있던 시절이다. 어머니는 당시 만 7세 였다. 65년전 일이지만 어머니는 당시 월남 과정을 어제일처럼 기억하고 계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1남 5녀를 두셨는데 맨 위로 아들, 그리고 내리 딸만 다섯이다. 어머니는 그중 세째딸이다. 어머니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할아버지는 먼저 맨 위 자식 둘 (삼촌과 첫째이모)을 데리고 서울로 내려와 있었다. 아래는 어머니가 생생하게 풀어주신 당시 이야기를 내가 최대한 어머니의 목소리로 살려 기술한 것이다.

이상하게 아버지가 며칠째 계속 보이질 않았어. 아버지가 어디 가셨을까 궁금했지.

그런데 하루는 엄마가 나(당시 7세)와 언니(당시 10세)에게 오더니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따라서 어디를 가라는 거야. 언니 손에는 작은 아버지 이름과 주소를 적은 종이와 약간의 돈을 쥐어 주셨어. 나는 영문도 모르고 처음 보는 이 아저씨를 따라서 언니와 함께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어.

그 아저씨와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렸고 걷기 시작했는데 깜깜한 밤이였어. 이제부턴 걸어서 산을 넘어야 한다는데, 입벙긋 하지 말고 쥐죽은듯이 따라오라고 하더라고.

아저씨를 따라 산을 넘는데 깜깜하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엔 산길도 아닌것 같았어. 보이는것도 없고 길이 얼마나 좁았던지. 그런데 어디서 사람 기침소리가 났어. 모두 화들짝 놀랐지. 언니와 나보고 엎드리라고 하더라고. 나무뒤에 웅크려서 숨죽이고 있었어. 아저씨가 나와 언니를 확 덮치며 자세를 더 낮추라고 해서 거의 눕다시피 했어. 어찌나 겁이 나던지.

다행이 인기척이 사라지고 발걸음을 재촉해 산을 넘어 어떤 집에 도착했어. 거기서 조로 만든 밥을 주었는데 정말 배가 고팠지만 처음 먹어보는 것이고 너무 퍽퍽해서 거의 먹을 수가 없었지.

그 집에서 어떻게 웅크려 자고 다음날에 아저씨가 언니와 나를 한 기차역에 데려다 줬어. 그리고 그 아저씨가 언니에게 혹시 돈 가지고 있는것 있냐고 물어봤어. 언니는 엄마가 준 돈이 있었지만, 없다고 둘러댔어. 그리곤 그 아저씨는 역 사무실로 가는 것 같더니 그 뒤로 보이질 않았어. 우린 여기서 기차를 타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 난 전혀 몰랐어. 언니도 몰랐던 것 같애.

그 기차역 플랫폼에는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 언니와 나 이렇게 조그만 여자아이 둘만 있는게 안스러워 보였는지 ‘어디로 가냐, 부모님은 어디있냐’ 등등을 물어오는 사람이 많았어. 그리고 부모님이 없다는 걸 알고 ‘우리 가족과 같이 가자’고 말해준 사람도 있었지.

한참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는데 역 한쪽에보니 사탕 장수가 있었어. 그게 얼마나 먹고 싶던지. 사탕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을건 알았지만 너무 먹고 싶어서 언니를 졸랐어. 결국 하나씩 사먹었는데 아까 돈 없다고 거짓말 한게 탄로날까봐 그 아저씨가 있나 주위의 눈치를 열심히 살폈어. 지금 생각하면 (돈으로 사탕 사먹은게) 참 어리석었지 (웃음)

한참을 기다리니 기차가 왔는데, 이게 사람이 타는 기차가 아니고 화물기차였던 것 같애. 사람들이 앞다투어 올라타는데 기차 안에 타는게 아니고 기차 꼭대기 짐칸에 기어 올라가서 타는 거야. 언니는 어떻게 올라갔는데 나는 힘이 부쳐 도저히 혼자 힘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어. 아까 같이 가자고 말하던 가족들도 막상 기차가 오니 다들 자기 가족 올려 태우기 바빴어. 기차에 못 올라가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기차가 ‘빠~앙’ 기적소리를 내는 거야. 곧 떠난 다는 말이지. 그 때 얼마나 눈앞이 캄캄하던지. 그 길로 기차가 떠났으면 난 그냥 고아가 되는 거야 (그리고 윤필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그 때 마지막 순간에 누가 날 기적적으로 끌어 올려줬어. 간신히 기차에 올랐지. 기차를 타고 간다기 보다 기차칸 꼭대기에서 찬바람 맞으며 ‘실려’ 가는 거였어.

서울에서 내려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이 어딘지 어떻게 알아. 주위에 물어보니 이번 정거장도 서울이고 다음 정거장도 서울이래. 난감했지. 그냥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역에서 내리기로 했어. 내리고 보니 그게 서울역이였어. 그렇게 언니랑 나랑 딸랑 둘이서 서울역에 온거야. 주소하나 들고.

그 때부터 물어물어 경찰서를 찾아 다녔지. 주소를 찾아가야 하니까. 경찰서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어. 간신히 찾아 경찰의 도움을 받아 회현동의 작은 아버지집에 도착했어. 가보니 거기 아버지가 계신거야.

나중에 안거지만, 아버지는 먼저 남쪽으로 와계셨어. 오빠랑 큰 언니를 데리고. 아버지에 들은 이야기론 아버지는 오빠랑 큰 언니랑 38선을 건너다가 한번 걸렸다는 거야.

아버지는 당시 북에서 남한돈을 좀 바꿔서 가지고 가고 있었는데, (남한돈이 걸리면 더 문제가 될 것 같애서) 틈을 타서 돈을 몽땅 보리밭에 버리셨대. 당시 38선에서 아이들은 잡지 않고 어른만 잡았기 때문에 오빠랑 큰 언니는 잡혀가지 않고 아버지만 연행되었어. 연행도중 아버지가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뒷문(?)으로 탈출하셨대.

나랑 작은 언니가 서울에 오고나서 며칠 지나서 엄마와 동생들도 왔어 (재봉틀도!). 이렇게 3번에 나눠서 월남한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무사히 건너온게 기적이지.

엄마는 이어서 1-4 후퇴때 피난 가신 이야기도 이어서 해주셨다. 거기에도 기차 꼭대기에 얹혀 가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추운 겨울이라 더 힘들었고, 기차 위에서 뭔가에 부딪히거나 기차에서 떨어져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고 증언하신다. 다행히 할머니가 어린 딸들이 기차에서 떨어질까봐 꼭 붙들고 계셨는데, 할머니가 그 와중에 꾸벅 꾸벅 졸기도 하셔서 마음이 불안했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그때 기차에서 안 떨어진게 행운이였고, 떨어졌으면 분명 그대로 철로 옆에서 얼어 죽었을 것이라고 하신다.

어머니께 왜 이렇게 영화같은 이야기를 이제껏 나에게 한번도 들려주지 않으셨나고 물었다. 어머니 대답은 ‘네가 물어보지 않아서’ 였다 (내가 집에서 좀 말이 없긴 하다). 갑자기 모든 인생이 기적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는 인간이 태어난 것 자체가 기적같다. 아버지쪽 사연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좀 더 열심히 그리고 진지한 마음으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솟구친다. 아울러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께 무한 감사하다. 그리고 1948년 38선 이남의 한 기차역에서 어머니를 기차에 끌어 올려주신 이름 모를 그 누군가에도 깊은 감사를 표한다.

커리어 상담 3 – 니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라

작년에 CKA (Council of Korean Americans)에서 주최한 멘토십 행사에 패널로 초대 받아 참석한 적이 있다. 실리콘 밸리등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학생들과 young professional 들을 대상으로 한 행사였는데, 한인으로서 법조인, 창업가, 기업가, 사회 운동가, 투자가등 미국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나와서 젊은이들에게 커리어 관련 조언도 해주고 네트워킹도 하는 그런 자리였다. 나는 사실 다른 연사님들에 비하면 경력도 일천하고 나이도 어려서 어찌 보면 낄 자리가 아니였는데, 잘 아는 분이 초청을 해주신 덕에 VC/PE 패널에 참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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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A 멘토십 행사중 VC/PE 패널 – (왼편부터) Perry Ha, Hoon Cho, Me, Han Kim

그 때,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고민하다가 3가지 사항을 전달하기로 하고 한장짜리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원래 슬라이드 길게 만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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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오늘 블로그에선 두번째 항목인 “Make yourself uncomfortable”에 관해 말해 보고자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천성적으로 편한 것을 찾게 마련이다. 만나는 사람도 편한 사람이 좋고, 환경도 편한 곳이 좋다. 이런 성향은 직업에서도 나타나기 쉬워서 자신이 특별히 의식하고 바꾸지 않는한, 익숙한 환경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쉽다. 뭐 이게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익숙하면 그만큼 능률도 오르고 실수도 적어질테니 말이다.

하지만 본인이 커리어 후반부 (은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아닌다음에는 이런 익숙함을 의식적으로라도 탈피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자기 커리어를 발전시키고 꾸준히 성장시키고 싶은 사람들에 해당하는 말이다. 어떤 환경과 일에 대해 익숙하고 편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별로 배우는게 없다는 의미도 된다.  새로운 스킬이나 경험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별로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익숙한 일을 계속 하고 있으면 실수할 확률도 줄어들지만, 새로 배우고 깨닫고 성장할 일도 그만큼 없어진다. 요새 점점 더 느끼는건데 고통 없는 성장이 어디 있을까 싶다. 특히 커리어의 초기에 있는 20대 친구들에는 이런 ‘불편한 경험’을 많이 해보라고 조언해 주고 싶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난 한국에서 대학시절에 휴학을 하고 우연한 기회로 미국에서 모 주립 대학교를 1년 다닌 적이 있다. 그 전에 외국 여행은 커녕 비행기도 타본적이 없던 터라, 참 모든게 낯설었다.  의식주 같은 민생고 문제도 해결하기 만만치 않았고, 영어도 서툴러서 암울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래도 19살이라는 젊음이 도와줬던지 이내 적응했고 학교 생활을 나름 즐기게 되었다. 이렇게 저렇게 만난 미국 친구들과 모임이나 주말 여행도 다니고, 한 친구의 권유로 캠퍼스 도서관 수위 같은 아르바이트도 하며 돈도 벌었다. 공부도 처음에는 영어가 딸려 숙제가 뭐였는지 알기 힘들정도 였지만, 나중엔 다른 미국 친구들 숙제를 도와줄 정도가 되었다. 그때 1년동안 의식적으로 노력한게 있다면 일부러 한국사람을 멀리한 것이였다. 짧은 기간인 만큼 영어와 미국 생활, 미국 사람들 문화에 푹 젖어보고 싶어서였다. 그 대학이 있던 동네는 한인 교포사회가 꽤 큰 곳으로,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교류하면 먹고 사는 문제를 많이 도움 받을 수 있었겠지만, 되도록 일부러 피해다녔다 (아마 다른 한국 학생들은 이런 나의 행동을 탐탁치 않게 여겼을 것이고 나도 알고 있었다). 짧은 1년이였지만 참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였고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미국으로 다시 유학가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

한가지 더 개인적인 예를 들겠다. 나는 원래 공대 출신으로 뭔가를 만들어 내거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하는 일을 주로 해왔다. 그러다가 MBA를 하면서 커리어 전환을 해서 투자쪽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내가 원했던 것이고 기회가 생겼으니 exciting 한 일이였지만 이 역시 사실은 처음에 많이 ‘불편한’ 일이였다. 경영이라고는 MBA하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런 저런 과목을 들은 것 밖에 없는데, 내가 감히 특정 인더스트리에서 20~30년 경력을 쌓은 사장님들 (그것도 나보다 말빨이 10배는 뛰어난 미국 사람들)을 독대하며 그들의 사업을 ‘평가’ 하고 결론을 내린다는게 어불성설 같았다. 고백하건데 그들이 나를 너무 애송이로 바라보지는 않을까와 같은 이상한 insecurity도 있었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이런 불편하고 불안했던 마음도 오래가지 않아 없어졌다. 물론 열정을 가지고 사업을 하시는 사업가 분들을 뵐때면 지금도 존경심이 팍팍 솟지만, 그분들을 만나는걸 불편해 하기 보다는 즐기게 되었다. 투자나 평가와 상관 없이 ‘만나서 배울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게 되었고, 내 질문에 교묘한 답으로 피해가시는 분들께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배짱도 생겼다.

그럼 어떻게 자기 자신을 ‘불편한 위치’에 있게 할 수 있나? 이건 우연한 기회에 생길수도 있지만, 역시 본인의 노력이 크게 좌우한다. 같은 회사에서 다른 기회, 다른 책임을 맡아 볼 수도 있고, 다른 회사, 다른 인더스트리,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안 찾아서 그렇지 찾으면 기회는 무궁무진하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도전에 봉착하면 누구나 처음에는 낯설고 uncomfortable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느낀다면 ‘아 내가 성장하고 있구나’라고 인식하고 계속 나가면 된다. 결국은 편해진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과 같은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힘들고 불편한 초기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만큼 성장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커리어 상담 2 – MBA 할까요 말까요?

아마 MBA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학위도 없을 것이다. MBA를 마치고 성공적으로 커리어 전환을 한 사람들은 ‘MBA 간것이 내 인생에서 최고 잘한 결정이였다’고 말할정도지만, 간혹 내가 아는 사람중에는 MBA를 아예 혐오하다시피해서 인재 채용시 MBA 학위가 있는 사람에겐 마음속으로 감점을 주는 사람도 있다.

MBA 가는 것을 결정하는게 어려운 이유는 이게 꼭 필요한 학위가 아니라는데 있다. 예를들어 의사가 되려면 미국에선 일반적인 경우 무조건 medical school을 가야하고, 변호사가 되려면 무조건 law school을 가야하는데, 비지니스 맨이 되려고 꼭 business school을 가야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훌륭한 사업가나 비지니즈맨 중에 MBA를 안한 사람이 훨씬 많다. MBA를 하면 비지니스 전반에 관해 많이 배우면서 인맥도 넓히고 커리어 전환의 기회도 생기니 좋아 보이다가도,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고, 졸업한다고 해도 딱히 뭐가 보장되는게 없으니 한편으론 리스크가 큰 투자다.

재무에 밝은 이들은 MBA에 들어가는 총 비용과 미래의 예상 소득 증가량을 추정해 엑셀로 present value 모델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 꼭 ROI로만 따질소냐.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지. 하지만 ‘정말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전에 최대한 자기가 가고자 하는 분야에서 선배들 (MBA 한 사람, 안한 사람)과 많이 상담해보기를 추천한다.

나는 MBA를 한 사람으로서 MBA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비지니스 스쿨 가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사정과 처지는 너무 다르기에. 아래 MBA를 가고 싶어하는 가상의 이유를 들어 설명을 할테니 참고하시라.

1) 커리어 전환 – 미국 풀타임 MBA를 오는 가장 흔한 이유다. 예를 들어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난 컨설팅을 해야겠어’ 이런 결심이 들면 MBA가 좋은 통로가 된다. 비지니스 스쿨에는 MBA들에게 인기 있는 직종 (뱅킹이나 컨설팅)의 회사들이 늘상 사람 뽑으러 오기 때문에 좋은 기회를 잡을 확률이 높아지고, 또 비슷한 관심분야의 학생들을 만나게 되니 정보교환이나 네트워크면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 커리어 전환에는 종류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암튼 자신이 속한 인더스트리가 아닌 곳으로 진출하는 것은 다 커리어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2) 한국에서 미국으로 진출 –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회사를 옮기면서 미국으로 나가고 싶은데 바로 가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MBA가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렇게 성공하신 분들도 좀 봤다. 물론 비자문제 등이 만만치 않지만, MBA를 대량으로 뽑는 회사들은 비자를 스폰서 해주는데가 많다. 다만 이런 경로로 성공하신 분들의 공통점은 어렸을때 외국에 거주한 경험등으로 영어가 거의 막힘이 없는 사람들이였다는 점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3)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찾고 싶다 – 이건 완전 내 경우다. MBA지원할때 물론 거창한 career plan을 써냈지만, 속으론 뭘 하고 싶은지 잘 몰랐다. 이렇게 soul searching을 하러 MBA에 오는게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제가 좀 많다. 실제로 학교에 입학하고 1-2개월내로 서머인턴 리크루터들이 학교에 몰려오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거다. 물론 이런것에 안 휩쓸리고 계속 혼자서 묵묵히 쏘울서칭 할수도 있겠지만 생각만큼 쉽지않다. 비지니스 스쿨에 가면 항상 peer pressure라는게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남들 다 인턴쉽 받았는데 나만 없으면 그거 꽤 스트레스다.

4) 인맥을 넓히고 싶다 – 내가 생각하는 비지니스 스쿨의 가장 큰 장점중의 하나다. 사람들과 인맥 교류를 할려고 학교에 간다는건 좀 어불성설 같기는 하지만, 미국 탑 스쿨에 MBA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정말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어울려서 진지한 대화도 나눠보고 놀기도 하고 교류를 쌓을 수 있었던건 다른데서 얻기 힘든 소중한 경험이다. 꼭 MBA에서 사귄 친구가 나중에 내 사업에 도움을 주는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성을 경험한건 그자체가 공부였고 재산이라고 본다.

5) 공부가 하고 싶다 – 비지니스 스쿨도 ‘학교’이니 공부가 주 목적이어야 하겠지만, 참 현실이란게 공부때문에 MBA오는 사람은 참 적은것 같다. 나는 사실 공부도 좀 목적이 있었다. 공대 출신으로 자꾸 비지니스 하는 쪽과 부딫히다보니 용어도 모르겠고 한계를 좀 느낀적도 있었다. 그래서 MBA 1학년땐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학부에서 경제학과목조차 한번 들은적 없는 나같은 사람에겐 MBA 필수 과목들은 상당히 유용했다. MBA 과정이란게 공학이나 과학에 비해 난해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만하지도 않은 것이 양이 장난아니게 많아서다. 파이낸스, 어카운팅, 오퍼레이션, 마케팅, 인사관리, 미시경제, 거시경제같은 기초과목들은 물론, 심지어 윤리, 법 과목도 있었다. 대부분 얇게 훑는 수준이지만, 첨보는 사람에겐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요는 MBA가서 공부가 하고 싶으면 실컷 할수도 있는데, 올 A를 받는다고 취직이 잘되거나 그런 일은 별로 없다.

6) MBA라는 간판을 따고 싶다 – 좀 불건전(?)한 목적 같아 보이지만, 미국이나 한국이나 사람사는 세상이니 이런 생각으로 비지니스 스쿨 오는 사람도 어느정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MBA 간판이란게 졸업후 수년내에는 리크루팅과 같은 면에서 어느정도 효력을 발휘하지만, 그닥 오래가지 못한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졸업하고나서 4-5년 지나고나면 그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현재 무슨 일을 어디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해내고 있느냐이지 어떤 학교를 나왔느냐는 큰 고려사항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상황이 좀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7) 2년간 골프도 좀 치고 놀고 싶다 – 점점 이상한 목적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누구도 겉으로 ‘난 MBA에 놀러 간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막상 와서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는데 집중하는 친구들도 꽤 있다. 가만히 보면 노는데 집중하는 사람도 다 이유가 있다. 투자은행 같은데서 혹사당하다 온 친구들은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놀아보냐’는 생각들도 있는 것 같고, 네트워킹을 위해서 학교에 온 친구들은 ‘놀면서 사귄다’라는 철학도 있는 것 같다. MBA가 재미있는게 그 많은 과목들 케이스 다 분석하며 공부하려면 끝도 없지만, 놀라고 마음먹으면 또 놀 것도 끝없이 많다. 거의 매일 어디선가 파티가 있고, 소모임, 클럽활동, 각종 여행, 스포츠 등 다 나열할 수도 없다. 한국분들은 너무 골프에 집중하는 경향이 많은데 가능한 다양한 놀거리에 참가해 보기를 권한다. 이런 기회가 쉽지 않으므로.

그래서 결론은 본인이 MBA 가는데 관심이 있다면, 왜 가고 싶은지 그 이유를 솔직히 한번 적어보고 그게 정말 말이 되는 이유인지 주위 선배들이나 지인을 통해서 여러번 검증해보는 절차를 가지는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