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가서 전기및 컴퓨터공학 석사 과정에 막 입학 했을 때 였다. 학교에서 신입 대학원생들을 모두 불러 저녁 만찬행사를 열어주었다. 그때 학과장 교수님이 나와서 축사 비슷한 것을 해주셨다. 난 그저 한국에서처럼 높은 분이 나와서 인사치레 말만 하시겠지라고 짐작했는데, 의외로 인상깊은 말을 해주셔서 15년도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다 잊어버렸고, 이 말 한마디만 기억난다.
“I want you to be a leader in your field, whatever you pursue.” (여러분이 무엇을 추구하던간에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리더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만 귀에 따갑게 듣고 자란 나로서는 사실 약간 충격이였다. 당시 공부 정말 열심히 할 각오로 유학나왔던터라 학교 수업과 연구외에는 다른 생각이 별로 없던 시절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보고 앞으로 리더가 되라니… 물론 나한테만 한 이야기는 아니고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이였지만 신선한 충격이였다. 나름 한국에서 고등교육 코스를 밟아 왔지만, 어느 누구도 나보고 ‘리더가 되어라’ 혹은 ‘리더의 꿈을 키워라’ 라고 말해준 사람이 내 기억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냥 나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라는 말만 반복했고, 난 사실 그 말에 충실히 따른 범생이였다. 나는 ‘리더’는 ‘높은 분’ 혹은 ‘우두머리’의 영어식 표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 개념도 몰랐던 것 같고, 높은 위치는 열심히 노력하다가 나이 먹고 운 좋으면(?) 얻는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흐른후에 MBA를 가게 되었는데, 여기선 본격적으로 리더쉽에 관한 교육을 많이 받았다. 리더쉽에 관한 토론식 수업도 있었고, 리더로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법에 관한 수업도 있었으며 (둘다 필수 과목), 1학년이 끝날때쯤엔 자신의 리더쉽 스타일을 고찰하는 장문의 에세이도 써야했다. 수업이외에 리더쉽 관련 트레이닝도 많았는데 산악지역이나 남극같은 곳에 떼지어 여행하며 하루에 한명씩 돌아가며 그룹 리더역할을 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나는 칠레의 열대우림 지역인 파타고니아에서 밥해먹고 텐트치고 자면서 열흘간 돌아다니는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이런 리더쉽 교육에 관해 MBA내에서도 그 효용성에 관해 논란이 많았다. 리더쉽 교육 무용론의 대표적인 주장은 ‘리더쉽은 교실에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리더쉽은 실제 역할을 맡고 부딪혀 보면서 길러지는 것이지 교실에서 이론으로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한때는 이런 주장이 맞다고 생각했다. 특히 리더쉽 수업이 상당히 짜증나는 과목이였고 장문의 에세이는 정말 고역이여서 ‘이런다고 리더쉽이 길러지나?’ 라는 불평을 친구들에게 늘어놨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저런 리더쉽 교육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금도 리더쉽 스킬을 교실에서 기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어떤 리더가 바람직한 모습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많았다. 여러 훌륭한 리더들의 케이스 스터디나 비디오를 보면서 영감을 얻었던 때도 있었고, 리더라는 사람이 꼭 높은 위치(포지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꼭 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형 웅변가일 필요도 없다는 것도 어느정도 깨달았다. 무엇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혹시 미래에 어딘가에서 리더가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향후 리더를 평가해야 한다면 어떤 잣대를 사용할 것인가 등을 생각해 본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대학을 갓 졸업했을때는 리더쉽에 관한 생각이 완전 황무지였다면, MBA 교육과정을 거치고 나서는 주위의 작은 일상에도 리더쉽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경우가 많았다. 리더쉽 스킬은 실전에서 길러지겠지만, 적어도 바람직한 리더쉽에 대한 생각의 프레임은 교육이나 독서가 가르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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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일어난 가슴아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한국에서 리더쉽 부재에 관한 논란이 많다. 선원과 선장, 선박회사, 언론, 구조 기관, 정부등 혼란스런 상황에서 다들 책임전가에만 급급한 모습이지 내가 기대했던 ‘리더’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기 어려웠다 (예외: 손석희 사장). 그 중에서도 재난 구조의 총 지휘와 책임을 맡은 사람이 어느 기관의 누구인지조차 모호한 상태에서 우왕좌왕했던 정부의 모습은 정말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였다.
우리 주위에는 어렸을때 줄반장부터 과장, 차장, 부장, 팀장, 사장, 회장등 각종 ‘장’들이 많지만, 역설적으로 책임지고 이끌어주는 리더를 찾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반 회사든 정부 기관이든 어디를 가더라도 크고 작은 조직에는 리더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이번 사태를 보고 미루어 짐작컨대 세상에는 리더쉽 의식이나 고민같은 것 한번 없이 어찌어찌 하다가 리더 역할을 해야하는 자리에 앉게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점은 외국도 마찬가지일 것). 이런 현실이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리더쉽 함양교육을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바람직한 리더상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라도 주었으면 좋겠다. 리더쉽 교육은 꼭 리더가 될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바람직한 리더상을 정립하는 것은 훌륭한 리더를 뽑고 평가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