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아들에게 감탄하듯 뱉어낸 말이다. 블랙 코미디 성격이 강하지만, 짧고 강렬한 메시지라서 그런지 명대사 중 하나로 많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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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참 힘든 시기다. 지금도 힘들지만 앞으로 코로나 사태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불확실 때문에도 힘들다. 10여년 동안 많은 수의 스타트업 대표님들과 일을 해 보면서 느낀게 있는데, 사업을 잘 하시는 대표님들을 보면 여러가지 불확실한 변수에 대해 계획을 미리 짜 놓는다는 것이다. 제품을 출시했을때 시장 반응이 좋았을 경우는 어떻게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어떻게 대처한다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계획을 말한다. 이게 아주 상식적이고 당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설정하고 그에 대한 계획과 준비를 실천하는 CEO는 생각보다 드물다.

많은 경우 Plan A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린다. 열심히 달리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겠지 라는 간절한 마음과 함께. 열심히 달리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본인과 팀의 ‘열심’과는 상관 없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경영자는 항상 리스크를 생각해야 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어떤 스타트업 대표가 펀딩을 나선다고 가정했을때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가능할 것이다.

  • Plan A: 원하는 목표금액 30억을 펀딩 받아, 개발자도 충원하고 마케팅도 늘려서 내년까지 매출 3배 성장하겠다.
  • Plan B: 30억 펀딩이 여의치 않으면 좀 더 낮은 밸류에 10억을 펀딩 받아 최소한의 인력만 뽑고, 매출 20% 성장을 꾀하며 다음번 도약의 때를 기다리겠다.
  • Plan Z: 펀딩이 아예 안될경우,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은 철수하고 인력 감원해서 현금이 바닥 나기전에 BEP를 맞춰 일단 생존한다.

사람의 본성이란게 잘 안풀리는 경우를 계속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기 마련이다. 특히 스타트업을 하는 창업자들은 낙관적인 성격을 가진 분이 많으니 Plan A가 잘 풀릴거라고 믿고 거기에 몰빵해서 정진하는 습성이 강할 수 있다. Plan Z는 상상만 해도 괴롭다.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를 내보내야 할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는 일이니 얼마나 괴롭겠는가. 허나 그 괴로운 경우에 대한 생각을 해야하는게 CEO의 임무다. 그것도 미리미리.

한가지 결과 — 그것이 제품이든, 펀딩이든 –로 인해 회사가 죽느냐 사느냐와 같은 구조가 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배수의 진’을 치고 사력을 다했더니 대박이 났다 같은 이야기는 드라마에서나 재미있는 소재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그런 길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도 이런 말을 했다.

I don’t believe in the bet-the-company bets. (회사의 사활을 거는 베팅 같은건 믿지 않는다)

아마존도 실험정신이 뛰어난 회사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시도 (혹은 삽질) 많이 했고 망한 것도 많다. 대표적인게 Fire Phone 이라 불리던 스마트폰이다. Fire Phone 이 망했다고 아마존이 망했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게 망해도 안전하게끔 다 구조를 만들어 놓고 한거다. 물론 대기업이니까 그게 가능했을거다. 하지만 베조스는 왠지 초창기 스타트업 때부터 저런 리스크 관리를 해왔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떤 사업이라도 리스크가 없을 수는 없다. 스타트업의 경우는 특히 이런 저런 리스크가 클 수 밖에 없다. 간혹 언론에는 창업자가 리스크테이킹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비춰지기도 하는데, 영민한 CEO는 사업성공을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리스크를 하나씩 하나씩 줄여가는 사람이다. 현금흐름 이슈가 있을거 같으면 펀딩이나 대출을 미리미리 확보한다든지, 6개월후 개발속도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면 개발자 인력 후보를 미리미리 섭외해 둔다든지 와 같은 일들 말이다.

벼랑끝 상황이 오기 전에 미리미리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에 대해서 계획을 세워두는 것. 그게 CEO의 임무다.

VC가 맞을 때와 틀릴 때

VC입장에서 투자에 대한 판단이 맞을 때와 틀릴 때를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4가지가 있을 것이다.

1. 잘 될거라 생각해서 투자했지만, 잘 되지 않는 경우

초기 투자자라면 이런 경우는 많이 겪게 된다.  투자 전에 이런저런 리스크나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지만, 막상 회사가 잘 안되거나 망하는 경우에는 너무 다양한 루트가 존재하고 변수가 많아서 예측이 쉽지는 않다. 초기 투자업의 특성상 투자 실패 사례는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거라고 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상 돈도 들어가고 시간도 많이 써가면서 도왔는데 잘 안되면 VC도 사람인지라 마음이 쓰리다 (물론 창업자 마음이 쓰라린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VC업을 하면서 스스로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2. 잘 될거라 생각해서 투자했고, 정말 잘 되는 경우

VC가 유일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경우이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다 잘 될거라고 생각하는 시점에 투자하는 경우는 이미 가격이 많이 올라 있어서 큰 돈을 벌기 어렵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거나 잘 안 될거라고 생각할때, 혹은 남들과 뭔가 다른 액세스가 있거나 특별한 인사이트가 있어서 높지 않은 가격에 투자할 수 있어야 돈을 벌게 된다. 가끔 엔젤 투자자 중에서는 잘 될거라는 확신 보다는 그냥 창업자와의 관계나 믿음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투자해서 좋은 수익을 거두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남의 돈을 투자하는 VC로서는 이런 투자를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좀 입장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3.  잘 안될거라 생각해서 투자 안했지만, 대박이 날 경우

어찌 보면 투자해서 돈 날리는 것 보다 더 큰 손실이라고 볼 수도 있다 (큰 수익을 낼 기회를 걷어찬 것이므로). 경험있는 투자자라면 항상 이렇게 될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고, 뭔가 내가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못보고 있는게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Airbnb를 초창기에 만난 투자자들은 모두 거절로 일관했다. 아마 미국에서 민박 사업 플랫폼은 말이 안된다고 다들 생각했을거다. 그 투자자들이 어리석었다기 보다 아마 Airbnb 창업자들의 엄청난 실행력과 집요함, 끈질김 등을 간과했을 것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대박 투자 기회를 눈앞에서 거절한 건이 몇번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훌륭하신 창업자를 못 알아본 내가 원망스럽다 ㅎㅎ.  다행히 그 분들과 좋은 관계는 다 유지하고 있어서 만나게 되면 늘 반갑고 볼 때마다 경외심이 든다.

4. 잘 안될거라 생각해서 투자 안했고, 역시 잘 안 된 경우

대부분 투자자들이 이런 경우 별로 말을 안해서 그렇지 실제 꽤 많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거봐라 내가 안될거라고 하지 않았냐’ 라고 떠들고 다니는 투자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내뱉는거나 마찬가지다. 스타트업은 이런 저런 이유로 잘 안될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안될거라고 예측해도 대충 맞는 경우가 훨씬 많다.  VC로서 스스로 공부차원에서 복기 하고 싶다면, 특정 스타트업에 대해서 잘 되기 어려운 이유나 리스크를 미리 적어 놓고, 몇년 후 그 팀이 그 어려움을 극복했는지 못했는지 혼자서 조용히 챙겨보면 된다.

사족1. 수많은 투자/비투자 경우를 아주 단순화 시켜 4개의 버킷에 넣다보니 커버되지 않는 경우들도 있는데, 예를 들어 잘 될것 같아서 투자하고 싶었지만 투자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투자 room 이 없었던 경우, 클로징 스케줄을 맞출 수 없었던 경우, 회사내 다른 사람이 반대한 경우 등등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사족2. VC가 투자를 안하는 이유는 꼭 그 회사가 잘 안될거라고 생각해서 그런건 아니다. 여러 다른 이유로 투자를 안하거나 못하는 경우도 많다. 투자 금액 사이즈가 안 맞는다든지, 사업 내용이 투자자가 다루는 영역과 다르다든지 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래서 VC가 투자를 못하게 되더라도 (큰 민폐를 끼친게 아니면) 너무 미워하지는 마시길 :)

투자자 미팅때 챙길 것들

초기 창업자로서 투자자를 만나러 가는 것은 익숙치 않은 일일 가능성이 높고, 다소 긴장되는 일이기도 하다. 긴장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준비를 하나라도 더 철저히 하면 그만큼 마음이 놓일 수 있고 미팅을 효율적으로 하는데 도움이 된다. 투자자와의 미팅은 그 포맷도 다양해서 투자사의 임원포함 10명 정도가 모두 참석하는 딱딱한 미팅도 있는가 하면, 그냥 한명과 캐주얼하게 까페에서 보는 경우도 흔하다. 창업자로서는 포맷이나 환경이 어떠하건간에 잘 준비를 해서 모든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면 나쁠게 없다. 아래 리스트는 그렇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투자자 입장에서 작성한 것이다.

[자료 준비 관련]

  1. 기본 소개자료 – 만약 1시간 미팅이라면 약 20-30분 정도 걸리는 발표자료 길이가 적당하다고 본다. 만나면 서로 인사도 해야하고, 많은 질문이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본자료는 들고가는 컴퓨터에도 넣어 놓고 만일을 대비해 USB에도 하나 담아둔다 (다른이의 컴퓨터를 써서 발표해야 하는 경우를 대비)
  2. 백업 자료 – 기본 소개자료에 담지는 않았지만, 뭔가 구체적인 수치나 지표, 영상 자료 등이 있다면 이들도 컴퓨터에 잘 넣어둔다. 이런 것들에 대해 질문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즉시 백업 자료를  이용해서 응대하면 좋다
  3. 데모 – 미팅 장소에서 뭔가 데모를 보여줄 수 있다면 이것도 준비해 간다. 스마트폰 앱이라면 컴퓨터에 연결해 미러링으로 보여주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다. 하드웨어라면 사전에 여러번 동작 테스트를 하고, 전원 케이블 등도 잘 챙긴다

[참석하는 사람 관련]

  1. 특별한 요청이 있지 않는한, 대표자 1명 혹은 공동창업자 포함 2명 정도가 가는 것이 좋다 (관련 블로그 참조 — 투자자 미팅에 몇명을 데리고 갈 것인가?)
  2. 두명이 가더라도 대표자가 전체 발표의 80-90%를 소화하고 다른 1명은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 좋다. 두명이 경쟁적으로 발언기회를 얻으려하기 시작하면 듣는 쪽에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워 역효과가 난다
  3. 상대방 투자자와 그 회사에 대해 인터넷을 뒤져 기본적인 조사를 해 두는 것도 추천

[복장 관련]

  1. 평상복이면 충분하다. 가끔 넥타이에 완전 정장을 하고 오시는 분들도 있는데 좋은 인상을 남기시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남자의 경우 셔츠에 청바지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다
  2. 단, 다소 지나친(?) 캐주얼도 추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날씨가 더워도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은 피하는게 낫다

[교통 및 시간 관련]

  1. 대중 교통 – 목적지의 주차장이 확실치 않다면 직접 운전해 가는 것 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게 낫다. 복잡한 도심에 주차를 어디에 해야할지 몰라 헤매다가 약속 시간 늦는 경우를 종종 봤다.
  2. 시작 시간 – 약속장소가 투자사의 사무실일 경우 약속 시간 보다 5분~10분 전에 도착하는 것을 타겟으로 하는게 좋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담당자에게 전화하면 이전 미팅 일정등으로 난감할 수도 있으니, 5분쯤 전에 도착해서 숨고르기 하며 잠깐 기다렸다가 시간에 맞춰 담당자에게 연락하는 것을 추천한다
  3. 마침 시간 – 1시간 미팅 스케줄이 잡혀 있더라도, 이야기를 하다보면 길어질 수 있으니 (특히 투자자가 깊은 관심을 보일때) 적어도 2시간 정도는 비워두는 것이 현명하다

[가지고 갈 물건들]

  1. 노트북 컴퓨터 – 충전을 100% 해둘것 (배터리 떨어져 가는 노트북을 보면 피칭을 듣는 사람도 마음이 불안해짐). 컴퓨터상 모든 알람을 꺼 둘것 (슬랙, 카톡, 캘린더 등)
  2. HDMI 어댑터 – 컴퓨터가 자체 HDMI 포트가 없다면, 어댑터를 꼭 휴대
  3. 발표자료 하드 카피 – 가끔 프로젝터가 고장 났다든지, 컴퓨터가 맛이 갔다든지 하는 일들이 있는데, 이도 저도 안되면 프린트물로 발표해도 된다. 종이는 절대 실패하는 일이 없다. 장소가 협소한 까페 등에서도 프린트물은 아주 훌륭한 전달 매체다
  4. 명함 – 아직 한국 문화에서는 종이 명함 교환이 일반적이라 혼자 뻘줌함을 방지하기 위해선 챙겨야 한다

빌 게이츠와 초 집중

얼마전 빌 게이츠가 명상에 관한 책 소개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그 책의 도움을 받아 명상에 입문했고 삶이 더 윤택해졌다는 내용인데, 나에게 인상 깊게 꽂힌 대목은 명상에 관한게 아니라 그가 젊은 시절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어떻게 일했는지에 관한 몇몇 대목이였다.

I stopped listening to music and watching TV in my 20s. (20대때 음악듣는 것과 TV 보는 것을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I was monomaniacally focused. (광적으로 한가지에 집중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시절 인 20대때 TV도 안보고 심지어 음악도 듣지 않으며 한가지 일에 몰두했다고 회고한다. 요즘엔 TV를 거의 안보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 주변에 많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넷플릭스, 유투브, 페이스북 같은 오락거리가 있기 때문인거고, 1980년대에 TV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지금으로 치면 인터넷 없이 살겠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아무튼 20대 청년의 빌 게이츠는 TV 시청이나 음악 감상이 소프트웨어를 생각하는 일에 distraction (주의를 분산시키는 일)이라고 단정짓고 5년간 자신의 삶에서 잘라내었다 (이와는 달리,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만드는 동안에도 밥 딜런과 비틀즈의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애플의 제품들이 마이크로소프트 보다는 좀 더 감성적인지도 모르겠다 ㅎㅎ)

사실 이뿐만이 아니다. 빌 게이츠는 인터뷰등에 나와서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이런 말도 여러번 했다.

“I was quite fanatical about work. I worked weekends. I didn’t really believe in vacations”
(저는 일에 대해서 광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주말에도 일했죠. 휴가라는걸 모르고 살았습니다)

휴가 제도라는게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뉘앙스의 말인데, 본인이 휴가를 안간거는 물론이고 아마 직원들이 휴가가는 것도 엄청 눈총을 줬을것 같다. 직원들이 휴가 쓰는데 눈치주는게 바람직한 경영자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빌 게이츠가 이렇게 광적으로 몰두한 것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초기 성장에 원동력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거다.*

얼마전 일론 머스크도 세상을 바꿀 만한 일을 하려면 주당 80시간은 쏟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때때로 100시간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트윗을 한적이 있다. 52시간이 법으로 정해진 나라에서 이런 발언은 논란의 소지가 많겠지만, 그래도 뭔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창업가는 일반 노동자와는 달라야 할테다.

집중해서 오래 일한다고 다 성공하는건 아니지만, 근무시간에만 일하고 주말과 개인시간을 다 즐기면서 성공한 창업가는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중에는 없다. 하다못해 대학교에서 A+를 받기 위해서도 수업시간 이외에 남다른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사업 성공은 과목에서 A+ 받는거 보다 100배는 어렵다.

빌 게이츠가 위에서 말한것 처럼 한가지 일 (그의 경우에는 소프트웨어)에 푹 빠져서 몰입한 상태를 평생 지속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울것 같다. 하지만 개인의 커리어에서 한두번쯤 그런 기간을 몇년이라도 가져보는 경험은 아주 소중하지 않을까? 또, 큰 뜻을 품고 시작한 창업가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각오와 실천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남의 시선 따위에는 신경 안쓰고 밥만먹고 한가지만 생각하는 사람, 심지어 밥먹으면서도 그 생각만 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존경심이 든다. 그렇게 몰입한 가운데서 혁신이 나오고 예술도 탄생하는 것 같다. 이 글 읽는 분 중에 그런 창업자 계시면 잠깐 쉬실때 저에게 연락 주시면 좋겠다. 투자를 떠나서 꼭 만나보고 싶다. 배우고 싶고 영감을 얻고 싶다.

*사족: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스티브 잡스에 비해 빌 게이츠는 좀 온화한 범생이 스타일 창업자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 듯 하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 초창기 일화들을 읽어보면 빌 게이츠는 절대 얌전한 성품의 사람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도 굉장히 intense 했다고 말하고, 쉴새없이 회사 사람들을 몰아부쳤다. 예를 들어 직원들의 차 번호판을 다 외우고 있었고, 창 밖 주차장을 내다보며 누가 언제 출퇴근 하는지 다 체크할 정도였다.

튜터링 투자에서 엑시트까지

<첫만남>

때는 2016년 여름. 튜터링 팀을 소개해 주신분은 이택경 대표님이였다. 튜터링이 막 매쉬업엔젤스의 투자를 받았던 때였고, 내가 한국 방문시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고 추천해 주셨다.

그렇게 김미희, 최경희 두 공동창업자 분들과의 첫 만남은 2016년 8월 27일 토요일 오전 9시에 있었다. 당시 우리 사무실이였던 디캠프로 오셨는데, 그날도 꽤 더웠던지라 도착하셔서 한동안은 선풍기 앞에서 열을 식히면서 자연스레 아이스 브레이킹을 했던것 같다.

토요일 아침이여서 그랬는지 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좀 여유가 있었고, 딱딱한 피칭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레 사업에 관해 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고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미팅후 남긴 메모를 보니 실행력, 기획력도 좋고 내가 던진 많은 질문에도 차분히 잘 대답하셔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적혀있다. 소개해주신 이택경 대표님께는 ‘창업자들이 원하면 소액투자 (1억이하)는 바로 가능하고, 지금 당장 펀딩을 원하지 않는다면 몇달쯤 진행상황을 보며 더 큰 라운드로 고려하고 싶다’고 미팅한 다음날 바로 알려드렸다.

<투자 검토>

2016년 11월, 12월에 업데이트 차원에서 몇번 더 만남을 가지며 튜터링의 사업모델과 팀의 역량에 대해 좀 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사용자 수나 유료결제액은 매월 상승하고 있었고, 나도 틈날때 몇번 써보며 해외튜터와 대화도 나눠보는 등, 서비스에 대한 감을 느껴 보았다. 재방문율, 결제율 같은 지표들도 좋았지만, 튜터링의 온디맨드 모델이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딱 좋다고 봤다. 영어학원을 다니든, 전화영어를 하든 뭘하든 간에 미리 시간을 정해놔야 하는데, 이게 바쁜 사람들에게는 여간 부담이 아니다. 튜터링은 온디맨드 방식 과외수업이라, 자투리 시간에 10초만에 선생님을 호출해서 회화연습이 가능하니 미리 시간 약속 없이도 누구든 의지만 있으면 잘 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마음맞는 선생님과 튜터링 밖에서 따로 만나는 일도 잘 없을것 같았다. 이런 ‘플랫폼 이탈’ 현상은 O2O서비스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이슈인데, 튜터링은 그런면에선 안전했다.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르는 바쁜 직장인들이 선생님과 미리 개인약속을 하고, Skype 연결하고, 해외로 과외비를 보내주는 등의 일은 매우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튜터링이 좋은 서비스가 되려면 선생님 퀄리티가 결정적인데, 양질의 해외 튜터를 선발하고, 교육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이였다. 이부분에서 많은 노하우를 축적한것 같았다.

<투자 진행>

주주명부등의 자료를 요청하며 본격적인 투자집행 모드에 들어간 것은 2017년 1월쯤이다. 튜터링 팀은 주단위로 수업수를 측정하고 있었는데, 주당 14%씩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월매출은 5천만원에 다다르며 꾸준한 상승세였다. 투자 적기라고 봤다.

나는 튜터링 팀에 5억 투자를 제의하였다. 빅베이슨에서 보통 첫번째 투자할때 하는 액수다. RCPS (상환전환 우선주)가 아닌 CPS(전환 우선주) 조건이였다. 1월초쯤 내부적으로 투자결정은 되었기에 1월내로 클로징이 될것으로 생각했지만, 많은 딜에서 그렇듯 늘 복병은 숨어있게 마련이다 — 갑자기 더 높은 밸류에 보통주로 투자한다는 투자자가 나와서 우리는 투자를 못하게 되는가 싶었다. 두어달간 난항이 있었지만, 결국 그 투자자의 제안은 일반적인 보통주와는 달리 여러 제약조건이 붙는 것이여서, 튜터링 팀은 최종적으로 깨끗한 텀의 빅베이슨측 투자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3월말 계약서에 싸인하고 5억 단독투자를 집행하였다. 그리고 1달쯤 후에 한 영어교육 회사로부터 3억을 추가로 투자 받았다. 튜터링의 영업이나 제휴쪽에 도움을 받기위한 포석이였다. 그리고 이걸 합쳐서 8억 투자 유치 PR 기사를 내었다.

<투자후 활동>

투자 집행이 되자마자 나는 튜터링의 사외이사에 취임하였다. 빅베이슨은 단독투자를 하거나 리드투자를 하는 경우에 보통 투자자를 대표해서 사외이사를 맡곤 한다. 이사회의 역할과 의무에 대해 익숙치 않은 VC도 많은데, 회사 초기부터 좋은 이사회를 구성하고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초기에야 창업자 중심의 경영일수 밖에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이사회 중심 경영이 훨씬 장점이 많다고 보는데 이건 내가 30대때 워낙 미국VC에서 훈련 받으며 세뇌당한게 있어서 어느정도 bias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암튼 사외이사라고 시어머니 노릇하려는 것도 아니고, 뭔가 뒤에서 컨트롤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바라보는 이상적인 투자자-경영진의 관계는 상호 존중하는 파트너십이다. 주요 사안들에 대해서 같이 의논하고 머리를 맞대고 결정하는 파트너. 그러기 위해선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튜터링 팀과는 정기적으로 1달에 1번, 혹은 늦어도 2달에 1번은 직접 만나서 회사 진행 상황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멘토링’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 내가 누굴 가르치려고 만나는게 아니다. 파트너십인데 누가 누굴 가르치겠나? 보통 만나면 회사의 기본적인 숫자들을 리뷰한 후, 각종 현안들에 대해 토의를 한다. 매출 계획, 자금 집행 계획, 제품 전략 등에 대해 경영진의 의견을 듣고 내 생각도 피력하곤 한다. 일종의 약식 이사회 미팅이라고 봐도 좋다.

2017년 3월. 튜터링의 사무실이였던 위워크 을지로 점에서 두 대표님과 함께

튜터링 팀은 올해초 이런 미팅에서 2018년 100억 매출 목표를 제시했다. 100억이면 꽤 높은 숫자였지만, 난 그런 공격적인 목표 설정이 좋았다. 스타트업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성장세가 좋았기 때문에, 팀이 집중해서 실행하고 마케팅에 좀 더 투자를 하면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나는 투자자로서 100억 목표 열렬히 지지했고 꼭 달성하시라고 당부드렸다 ^^

2017년 9월에는 튜터링이 빅베이슨을 통해 TIPS프로그램에 지원했는데 무사히 한번에 통과가 되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심사위원들 앞에서 튜터링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 발표해야 했는데, 나름 새로운 경험이였고 결과가 좋아서 뿌듯했다. TIPS를 통해 튜터링은 2년간 정부로부터 기술개발 지원금으로 5억원을 받게되어 R&D에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몇달전에는 튜터링의 사업개발을 직접 도와준 일도 있었다. EnglishinKorean 을 만드시는 마이클 선생님을 콜드 이메일을 통해 직접 만나서 설득하였고, 튜터링과 콘텐츠 제휴및 마케팅 협업을 성사시켰다. 내가 보기에 마이클 선생님은 영어회화에 관한한 최고 양질의 콘텐츠를 가진 분으로서, 튜터링 팀과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M&A 까지>

튜터링이 이름이 점차 알려지면서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튜터링으로 중국어 공부를 하시는 임정욱 센터장님이 페이스북에 몇 번 공유를 해주셔서 입소문이 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2018년 상반기에는 튜터링에 인수제안을 하는 회사들도 꽤 여러곳 있었는데, 반가운 징조이긴 하지만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므로 개인적인 생각으론 아직 때가 아니라고 봤다. 한편으론 이렇게 인수제의가 여러곳에서 들어오다보면 생각보다 빨리 엑시트가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올해 봄쯤부터는 튜터링이 본격적인 확장을 위해 후속투자 유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마켓디자이너스에서 강한 의지를 보이며 인수 제안을 줬다.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결국 두 회사가 한배를 타기로 양측이 합의했다. 빅베이슨은 다소 설명이 복잡한 이해상충문제로 인해 캐쉬아웃을 해야했고, 투자금의 몇배를 회수하는 선에서 마감이 되었다. 투자기간이 1년 반이 채 안되기 때문에 수익률 관점에서는 아주 좋은 편이지만, 아쉬움은 늘 남기 마련이다. VC는 업의 특성상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10배, 20배 수익을 내는 홈런을 노려야 하기 때문이다.

<맺는말>

튜터링이 이만큼 성장한 것은 오롯이 창업자들을 비롯한 임직원들의 밤낮없는 노고 덕택이다. 나는 운좋게 훌륭한 창업자를 만나 옆에서 응원해 드릴 기회를 얻은 것이다. 가끔 잘되는 스타트업을 두고 ‘내가 키웠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쓰는 투자자도 있는데 솔직히 듣기에 거북하다. 투자자가 창업자를 키우는게 아니다. 창업자는 스스로 성장한다.

튜터링은 앞으로도 훨씬 큰 성장을 할 것이라 믿는다. 합병으로 인해 빅베이슨과의 공식적인 관계는 일단락 되었지만, 두 창업자분들과 나와의 개인적인 인연은 아마 오래 갈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