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연로하신 부모님이 있다. 역경의 세월을 이기고 자식 셋을 키우셨지만, 나를 비롯 세명 모두 외국에 나가 있어서 두 분만 한국에 계신다. 아직은 다른 사람 도움을 많이 받지 않으시고 살고 계시지만, 매번 찾아뵐 때마다 조금씩 부모님이 노쇠해지신 것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특히 어머니는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파킨슨병 증세때문에 거동이 많이 불편하시다. 손떨림 증상이 예전엔 다른 사람 눈에 잘 띠지 않을정도로 미미했지만, 오늘보니 확연히 손을 떨고 계셔서 깜짝 놀랬다. 이제 어떤 때는 걸음 걸이도 생각대로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니 울컥한 마음만 앞선다.
부모님 집에는 아주 오래된 Singer 재봉틀이 있다. 어머니도 할머니께 물려 받은 것인데 아마 100년도 넘은 것 같다. 아직도 잘 작동하고 가끔 어머니가 쓰시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에도 Singer는 ‘명품’ 재봉틀이였고 할머니의 재산 목록 1호 였다.
문득 이 재봉틀을 할머니가 도대체 어떻게 들고 피난 나오셨을까가 궁금해졌다. 어머니쪽 집안은 평안도에서 격변의 세월동안 월남하셨다. 이삿짐을 부친것도 아니고 용달차도 없었을테니 도대체 저 무거운 재봉틀을 어떻게 들고 내려오셨을까? 궁금해서 어머니께 물어보니 할머니가 본체만 머리에 이고 내려오셨단다 (나무 책상은 나중에 따로 구입하신듯). 본체만의 무게도 상당하다. 이게 요새 재봉틀 같은 플라스틱이 아니다. 그냥 쇳덩이 무게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할머니가 이렇게 무거운걸 머리에 이고 걸어서 그 먼길을 오셨다는게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도 젖먹이 아이 (막내이모) 하나를 업고, 코흘리개 아이 하나 (4째이모) 는 한손에 잡고 말이다.
재봉틀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1948년에 월남하신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2년전이니 남북은 38선으로 갈려있던 시절이다. 어머니는 당시 만 7세 였다. 65년전 일이지만 어머니는 당시 월남 과정을 어제일처럼 기억하고 계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1남 5녀를 두셨는데 맨 위로 아들, 그리고 내리 딸만 다섯이다. 어머니는 그중 세째딸이다. 어머니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할아버지는 먼저 맨 위 자식 둘 (삼촌과 첫째이모)을 데리고 서울로 내려와 있었다. 아래는 어머니가 생생하게 풀어주신 당시 이야기를 내가 최대한 어머니의 목소리로 살려 기술한 것이다.
이상하게 아버지가 며칠째 계속 보이질 않았어. 아버지가 어디 가셨을까 궁금했지.
그런데 하루는 엄마가 나(당시 7세)와 언니(당시 10세)에게 오더니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따라서 어디를 가라는 거야. 언니 손에는 작은 아버지 이름과 주소를 적은 종이와 약간의 돈을 쥐어 주셨어. 나는 영문도 모르고 처음 보는 이 아저씨를 따라서 언니와 함께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어.
그 아저씨와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렸고 걷기 시작했는데 깜깜한 밤이였어. 이제부턴 걸어서 산을 넘어야 한다는데, 입벙긋 하지 말고 쥐죽은듯이 따라오라고 하더라고.
아저씨를 따라 산을 넘는데 깜깜하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엔 산길도 아닌것 같았어. 보이는것도 없고 길이 얼마나 좁았던지. 그런데 어디서 사람 기침소리가 났어. 모두 화들짝 놀랐지. 언니와 나보고 엎드리라고 하더라고. 나무뒤에 웅크려서 숨죽이고 있었어. 아저씨가 나와 언니를 확 덮치며 자세를 더 낮추라고 해서 거의 눕다시피 했어. 어찌나 겁이 나던지.
다행이 인기척이 사라지고 발걸음을 재촉해 산을 넘어 어떤 집에 도착했어. 거기서 조로 만든 밥을 주었는데 정말 배가 고팠지만 처음 먹어보는 것이고 너무 퍽퍽해서 거의 먹을 수가 없었지.
그 집에서 어떻게 웅크려 자고 다음날에 아저씨가 언니와 나를 한 기차역에 데려다 줬어. 그리고 그 아저씨가 언니에게 혹시 돈 가지고 있는것 있냐고 물어봤어. 언니는 엄마가 준 돈이 있었지만, 없다고 둘러댔어. 그리곤 그 아저씨는 역 사무실로 가는 것 같더니 그 뒤로 보이질 않았어. 우린 여기서 기차를 타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 난 전혀 몰랐어. 언니도 몰랐던 것 같애.
그 기차역 플랫폼에는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 언니와 나 이렇게 조그만 여자아이 둘만 있는게 안스러워 보였는지 ‘어디로 가냐, 부모님은 어디있냐’ 등등을 물어오는 사람이 많았어. 그리고 부모님이 없다는 걸 알고 ‘우리 가족과 같이 가자’고 말해준 사람도 있었지.
한참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는데 역 한쪽에보니 사탕 장수가 있었어. 그게 얼마나 먹고 싶던지. 사탕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을건 알았지만 너무 먹고 싶어서 언니를 졸랐어. 결국 하나씩 사먹었는데 아까 돈 없다고 거짓말 한게 탄로날까봐 그 아저씨가 있나 주위의 눈치를 열심히 살폈어. 지금 생각하면 (돈으로 사탕 사먹은게) 참 어리석었지 (웃음)
한참을 기다리니 기차가 왔는데, 이게 사람이 타는 기차가 아니고 화물기차였던 것 같애. 사람들이 앞다투어 올라타는데 기차 안에 타는게 아니고 기차 꼭대기 짐칸에 기어 올라가서 타는 거야. 언니는 어떻게 올라갔는데 나는 힘이 부쳐 도저히 혼자 힘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어. 아까 같이 가자고 말하던 가족들도 막상 기차가 오니 다들 자기 가족 올려 태우기 바빴어. 기차에 못 올라가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기차가 ‘빠~앙’ 기적소리를 내는 거야. 곧 떠난 다는 말이지. 그 때 얼마나 눈앞이 캄캄하던지. 그 길로 기차가 떠났으면 난 그냥 고아가 되는 거야 (그리고 윤필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그 때 마지막 순간에 누가 날 기적적으로 끌어 올려줬어. 간신히 기차에 올랐지. 기차를 타고 간다기 보다 기차칸 꼭대기에서 찬바람 맞으며 ‘실려’ 가는 거였어.
서울에서 내려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이 어딘지 어떻게 알아. 주위에 물어보니 이번 정거장도 서울이고 다음 정거장도 서울이래. 난감했지. 그냥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역에서 내리기로 했어. 내리고 보니 그게 서울역이였어. 그렇게 언니랑 나랑 딸랑 둘이서 서울역에 온거야. 주소하나 들고.
그 때부터 물어물어 경찰서를 찾아 다녔지. 주소를 찾아가야 하니까. 경찰서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어. 간신히 찾아 경찰의 도움을 받아 회현동의 작은 아버지집에 도착했어. 가보니 거기 아버지가 계신거야.
나중에 안거지만, 아버지는 먼저 남쪽으로 와계셨어. 오빠랑 큰 언니를 데리고. 아버지에 들은 이야기론 아버지는 오빠랑 큰 언니랑 38선을 건너다가 한번 걸렸다는 거야.
아버지는 당시 북에서 남한돈을 좀 바꿔서 가지고 가고 있었는데, (남한돈이 걸리면 더 문제가 될 것 같애서) 틈을 타서 돈을 몽땅 보리밭에 버리셨대. 당시 38선에서 아이들은 잡지 않고 어른만 잡았기 때문에 오빠랑 큰 언니는 잡혀가지 않고 아버지만 연행되었어. 연행도중 아버지가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뒷문(?)으로 탈출하셨대.
나랑 작은 언니가 서울에 오고나서 며칠 지나서 엄마와 동생들도 왔어 (재봉틀도!). 이렇게 3번에 나눠서 월남한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무사히 건너온게 기적이지.
엄마는 이어서 1-4 후퇴때 피난 가신 이야기도 이어서 해주셨다. 거기에도 기차 꼭대기에 얹혀 가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추운 겨울이라 더 힘들었고, 기차 위에서 뭔가에 부딪히거나 기차에서 떨어져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고 증언하신다. 다행히 할머니가 어린 딸들이 기차에서 떨어질까봐 꼭 붙들고 계셨는데, 할머니가 그 와중에 꾸벅 꾸벅 졸기도 하셔서 마음이 불안했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그때 기차에서 안 떨어진게 행운이였고, 떨어졌으면 분명 그대로 철로 옆에서 얼어 죽었을 것이라고 하신다.
어머니께 왜 이렇게 영화같은 이야기를 이제껏 나에게 한번도 들려주지 않으셨나고 물었다. 어머니 대답은 ‘네가 물어보지 않아서’ 였다 (내가 집에서 좀 말이 없긴 하다). 갑자기 모든 인생이 기적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는 인간이 태어난 것 자체가 기적같다. 아버지쪽 사연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좀 더 열심히 그리고 진지한 마음으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솟구친다. 아울러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께 무한 감사하다. 그리고 1948년 38선 이남의 한 기차역에서 어머니를 기차에 끌어 올려주신 이름 모를 그 누군가에도 깊은 감사를 표한다.
기적같은 이야기…^^잘 들었습니다 :)
세상에… 엄청난 일이 있었군요. 그 때 기차에 올라타시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저희 부모님도 6.25를 지나셨는데..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좀 더 열심히 진지하게 살아야 겠다.” 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네요.
한편의 영화같네요. 이시대를 살면서 정말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