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A 란 무엇인가?

스타트업 업계에 잠깐이라도 발을 들여본 사람이라면 아마 ‘시리즈 A’ 라는 용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한국어는 분명히 아닌데 이 낯선 외래어의 기원은 무엇이고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거두절미 하고 바로 시작.

1.법률적 (legal) 의미로서의 시리즈 A

일단 미국 기준으로 먼저 이야기를 좀 해야 한다. 시리즈 A 라는 말은 본래 회사의 우선주 주식의 종류를 일컫는 말에서 출발했다. 창업자로서 회사를 처음 만들게 되면 보통주(common stock)를 발행하게 되고 이 보통주는 공동창업자들이 나눠 갖게 된다. 창업후에 기관 투자자를 만나서 투자계약을 하게 되면, 주당 발행가격을 정하고 우선주(preferred stock)를 발행할 수도 있는데, 이때 첫번째로 발행이 되는 우선주 주식 묶음을 Series A Preferred Stock 이라고 부르게 된다. 즉, 회사가 발행한 첫번째 우선주라서 그냥 편의상 ‘A’ 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다음번에 발행하는 우선주의 묶음은 ‘Series B’ 라고 부를 수 있다. 우선주를 발행할때 꼭 어떤 이름을 써야 한다거나 알파벳 순으로 가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냥 발행가격과 시점이 다른 주식들의 종류를 구별하기 좋게끔 계약 당사자들 간에 이름을 붙일 뿐이다. 요새는 첫번째 라운드에서 ‘Series Seed’ 라는 이름도 흔하고, Series B 이전에 Series A-1, Series A-2 라는 파생(?) 이름을 쓰는 경우도 많다. 그야말로 엿장수 맘이다.

한국으로 넘어와서 보면, 스타트업 회사의 주주명부에서 “제1종 전환 우선주” 혹은 “제2종 상환전환 우선주” 와 같은 말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제1종” 이라는 것이 위에서 말한 미국의 Series A (A종)와 동등한 개념으로 봐도 좋다. 모두가 예상하듯이, “제2종”은 제1종 후에 발행된 우선주 종류주식일 것이다. 전환우선주 (Convertible Preferred Stock, CPS)와 상환전환우선주(Redeemable Convertible Preferred Stock, RCPS)의 차이점은 결국 투자금 상환조건이 있냐 없냐의 차이인데, 이것은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나중에 시간나면 다뤄 보도록 하겠다.

 

2.펀딩 라운드 혹은 펀딩 규모로서의 시리즈 A

“저희 회사는 6개월전 씨드펀딩을 받았고, 내년 상반기에 시리즈 A 펀딩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핀테크 스타트업 ‘헬로우머니’, 50억 시리즈 A 펀딩 성공”

스타트업이나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이런 기사나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런 예에서 시리즈 A라는 말은 펀딩 라운드 혹은 그 규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럼 과연 얼마짜리 펀딩을 받아야 시리즈 A 라고 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대로 우선주 종류의 이름을 붙이는 건 엿장수 맘이라서 1억만 투자를 받고도 시리즈 A 라고 명명해도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요새 스타트업에서 시리즈 A 라운드 라고 하면 보통의 경우 수십억 이상이고, 100억 이상도 많다. 예전보다 사이즈가 많이 커졌다.

내가 미국에서 VC에 입문하던 2000년대 후반에는 ‘씨드(Seed)’ 펀딩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흔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창업후 뭔가 첫 펀딩을 받을때 $1M~$2M (약 10억~20억) 정도 투자 받으면서 ‘시리즈 A 라운드’ 라고 하는게 자연스러웠다. 즉, 시리즈 A는 창업의 아주 초창기에 팀과 아이디어만 존재할때 들어가는 투자금이라는 인식이 꽤 있었다. 그런데 지난 10여년간 씨드펀딩이라는 말이 인기를 얻으며, 시리즈 A는 자연스럽게 그 뒷단계 펀딩이라는 의미로 바뀌어져 갔다. 그래서 사이즈가 커진거다. 10년전에 Series B 라고 부르던 걸 요새는 그냥 Series A 라고 부를 뿐이다.

통계치를 찾아보니 미국에서 Series A 라운드 평균 금액은 이제 100억을 훨씬 넘어간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게 창업 초기부터 다들 100억을 받고 시작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Series A 전에 창업자들은 보통 작은 규모의 펀딩들을 각고의 노력 끝에 받아내며 거기까지 왔을 가능성이 높다. Series A 까지 오는데 3-4년 걸렸으면 나름 준수한 편인거다.

 

3.회사 성장 단계로서의 시리즈 A

이런 대화에서 말하는 시리즈 A 라는 말은 스타트업의 성장단계에서 어느 지점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게 정확히 어떤 지점인지는 말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많이 다를수 있다는게 함정이기는 하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시대에 따라서 이말의 의미도 좀 변해왔다.

여기는 내 블로그이니 내 주관이 잔뜩 들어간 100% 객관적(!) 의견으로 말하자면, 요새 말하는 시리즈 A 단계 회사는 어느정도 product-market fit (제품의 시장 적합성)을 찾아내고 매출을 성장시키고 있는 회사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매출이 어느 정도되어야 하는지는 산업군 마다 너무 달라서 말하기 힘들지만, 소프트웨어 회사의 경우 기준으로 적어도 연간 10~20억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매출이 있어도 대부분 적자이기 때문에 보통은 계속 펀딩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정도 된 회사는 펀딩을 통한 자금도 있고, 매출을 통한 cash flow가 있기 때문에 다음달에 갑자기 회사가 문닫는 사태같은 일은 잘 벌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성공적인 앞날이 보장된 것도 아니다. 리스크가 여전히 꽤 있는 스타트업일 뿐이다.

직원으로서 시리즈 A 단계 회사에 스톡옵션을 받고 들어간다면, 먼 훗날 회사가 잘 되어서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가능성도 꽤 있다. 하지만 단기간 (2-3년) 안에 회사가 상장해서 대박 칠 것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시리즈 A 스타트업에 조인한다면 단기간의 금전적 보상 보다는, 회사와 내가 함께 성장할 수 있을지, 창업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중점적으로 검토하는걸 추천한다.

 

사족 및 여담

지난 10여년간 지켜봤을때 재미있는 트렌드는 스타트업들 마다 시리즈 A를 늦게 가려는 현상이 많이 보인다.  은근 초기 창업자들 사이에 본인의 회사가 시리즈 A 회사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는 듯 하다 — 뭔가 언론에 보도되는 시리즈 A 회사들은 엄청난 규모의 펀딩도 받았고, 매출이나 직원수도 상당해 보여서, 우리 회사는 아직 그정도는 아니니 편안하게(?) 씨드단계로 남아있자는 마음일 수 있다.  그래서 Seed 펀딩 후에도 Seed-1, Seed-2, Post-seed, Pre-A, Bridge라운드 등등 온갖 파생이름들이 동원된다 ㅎㅎ. 이렇다보니 펀딩 라운드 이름은 이제 다소 말장난 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행히 초기 스타트업에 중요한 것은 이런 인위적인 알파벳 놀이는 아니고, 심지어 50억, 100억 같은 펀딩 규모도 아니다. 결국 고객이 얼만큼 우리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랑하고 있고 그걸 돈으로(!) 표현해 주느냐가 제일 중요한 마일스톤 아닐까 생각한다.

창업 아이템 고르는 법

오래전 일이다. 2008년에 인텔에 입사했을때 오리엔테이션의 일환으로 회사의 최고위급 중역들이 한명씩 와서 이런 저런 조언도 해주고 질문도 받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인텔의 최고 법률 담당 임원 (General Counsel 이라 불림)이 오셔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가지기 위해 생각해 볼 프레임을 알려주셨다. 너무나도 명료하고 공감가는 메시지라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히 난다. (그 분은 바로 이듬해에 애플의 General Counsel 로 이직하였고, 스티브 잡스 아래에서 그 유명한 애플-삼성간의 법률 공방전을 진두지휘했다)

성공적인 커리어는 아래 3가지가 조화롭게 겹치는 영역에서 나타난다는 이론이였다. TOP 모델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3가지는 아래와 같다.

  • T (Talent, 재능)
  • O (Organization, 조직)
  • P (Passion, 열정)

즉, 개인적인 재능이 있어야 하고, 하는 일에 열정이 있어야 하고, 이 모든 것을 뒷받침 해줄 좋은 조직 (회사, 상사, 동료 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였다. 한번만 들어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내용이였다.

내 직업상 창업자, 혹은 예비 창업자들과 많은 상담을 하게 되는데, 성공적인 창업을 위해 아이템을 고르는 방법도 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걸 깨닫게 되었다. 즉, 위의 프레임에서 조금만 변형하면 이렇게 된다.

  • 내가 잘하는 것 (재능, 경험치)
  • 시장의 니즈가 있는 것 (마켓)
  • 내가 하고 싶은 것 (열정, 관심)

성공적인 창업 케이스들을 보면 위의 3가지가 겹치는 영역에서 생기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2가지는 확실해야 할 것 같다. 3가지 중에 굳이 경중을 좀 둔다면, 시장의 니즈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다. 재능이나 열정은 창업을 하면서 발전할 수도 있는데, 시장의 니즈는 쉽게 바뀌지 않아서 그렇다. 공동 창업자가 있다면 ‘내가’ 대신 ‘우리가’로 치환해서 생각하면 된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아들에게 감탄하듯 뱉어낸 말이다. 블랙 코미디 성격이 강하지만, 짧고 강렬한 메시지라서 그런지 명대사 중 하나로 많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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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참 힘든 시기다. 지금도 힘들지만 앞으로 코로나 사태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불확실 때문에도 힘들다. 10여년 동안 많은 수의 스타트업 대표님들과 일을 해 보면서 느낀게 있는데, 사업을 잘 하시는 대표님들을 보면 여러가지 불확실한 변수에 대해 계획을 미리 짜 놓는다는 것이다. 제품을 출시했을때 시장 반응이 좋았을 경우는 어떻게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어떻게 대처한다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계획을 말한다. 이게 아주 상식적이고 당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설정하고 그에 대한 계획과 준비를 실천하는 CEO는 생각보다 드물다.

많은 경우 Plan A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린다. 열심히 달리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겠지 라는 간절한 마음과 함께. 열심히 달리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본인과 팀의 ‘열심’과는 상관 없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경영자는 항상 리스크를 생각해야 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어떤 스타트업 대표가 펀딩을 나선다고 가정했을때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가능할 것이다.

  • Plan A: 원하는 목표금액 30억을 펀딩 받아, 개발자도 충원하고 마케팅도 늘려서 내년까지 매출 3배 성장하겠다.
  • Plan B: 30억 펀딩이 여의치 않으면 좀 더 낮은 밸류에 10억을 펀딩 받아 최소한의 인력만 뽑고, 매출 20% 성장을 꾀하며 다음번 도약의 때를 기다리겠다.
  • Plan Z: 펀딩이 아예 안될경우,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은 철수하고 인력 감원해서 현금이 바닥 나기전에 BEP를 맞춰 일단 생존한다.

사람의 본성이란게 잘 안풀리는 경우를 계속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기 마련이다. 특히 스타트업을 하는 창업자들은 낙관적인 성격을 가진 분이 많으니 Plan A가 잘 풀릴거라고 믿고 거기에 몰빵해서 정진하는 습성이 강할 수 있다. Plan Z는 상상만 해도 괴롭다.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를 내보내야 할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는 일이니 얼마나 괴롭겠는가. 허나 그 괴로운 경우에 대한 생각을 해야하는게 CEO의 임무다. 그것도 미리미리.

한가지 결과 — 그것이 제품이든, 펀딩이든 –로 인해 회사가 죽느냐 사느냐와 같은 구조가 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배수의 진’을 치고 사력을 다했더니 대박이 났다 같은 이야기는 드라마에서나 재미있는 소재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그런 길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도 이런 말을 했다.

I don’t believe in the bet-the-company bets. (회사의 사활을 거는 베팅 같은건 믿지 않는다)

아마존도 실험정신이 뛰어난 회사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시도 (혹은 삽질) 많이 했고 망한 것도 많다. 대표적인게 Fire Phone 이라 불리던 스마트폰이다. Fire Phone 이 망했다고 아마존이 망했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게 망해도 안전하게끔 다 구조를 만들어 놓고 한거다. 물론 대기업이니까 그게 가능했을거다. 하지만 베조스는 왠지 초창기 스타트업 때부터 저런 리스크 관리를 해왔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떤 사업이라도 리스크가 없을 수는 없다. 스타트업의 경우는 특히 이런 저런 리스크가 클 수 밖에 없다. 간혹 언론에는 창업자가 리스크테이킹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비춰지기도 하는데, 영민한 CEO는 사업성공을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리스크를 하나씩 하나씩 줄여가는 사람이다. 현금흐름 이슈가 있을거 같으면 펀딩이나 대출을 미리미리 확보한다든지, 6개월후 개발속도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면 개발자 인력 후보를 미리미리 섭외해 둔다든지 와 같은 일들 말이다.

벼랑끝 상황이 오기 전에 미리미리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에 대해서 계획을 세워두는 것. 그게 CEO의 임무다.

박쥐 살생의 추억

고백하건대 난 직접 박쥐를 몇 마리 잡아 본 사람이다. 그것도 집에서 테니스 라켓으로. 아마 내 주위에 박쥐를 잡아본 사람은 나 말고 거의 없을 것 같다.

때는 2006년이니 거의 14년 전이다. 그해 여름에 직장을 그만두고 MBA 공부를 하러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갔고, 새로 이사간 집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우리 아이들이 만 6세, 4세였고, 학군을 고려해 필라델피아 외곽의 조용한 동네에 아담한 집을 월세로 얻었다. 지하에는 창고나 서재로 쓸만한 공간이 있었고, 1층에는 부엌과 거실, 2층에는 방이 2개 있었다. 2층의 방 한켠에는 다락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었는데, 관심 없어서 처음엔 열어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이사한지 며칠 안되어 딸아이가 신기한 걸 봤다는 투로 자랑을 한다. 다락안에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걸 봤다는 거다. 너무 귀여워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니가 동화책을 많이 봤구나 ㅎㅎ. 혹시나 해서 다락문을 열고 안을 쓱 쳐다 봤는데 내 눈엔 별게 안 보여서 얼른 닫았다. 캄캄했던 다락 안은 왠지 캐캐묵은 먼지도 많고 더러울 것 같아 들어가 보기도 싫었고, 딸내미에게도 들어가거나 문 열어보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그리고 며칠 더 지나서였다. 밤늦은 시각이였는데 난 지하실에서 책상과 책꽂이 등을 셋업하며 이사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와이프가 날 찾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좀 빨리 올라와 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냉큼 1층으로 올라갔더니 와이프가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천장을 가리키며 묻는다.

“저게 뭐야…”

정체 불명의 검은 새가 거실 천장을 큰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위잉위잉, 퍼덕퍼덕.

나도 너무 황당해서 처음 몇초는 멍하니 쳐다만 봤다. 그건 박쥐였다.

‘얼마전 딸아이가 말하던게 진짜였구나 ㅠㅠ’

괴기영화도 아니고 현실세계에서, 그것도 내가 사는 집에서 박쥐를 맞닥뜨리다니…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하나. 현관문을 열어 바깥으로 내보낼까? 현재진행형 사건이므로 뭔가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어쩔줄 몰라 어버버 하고 있던 차에 박쥐가 2층으로 날아 올라갔다.

‘2층에는 아이들이 자고 있는데! 방문도 열려 있을텐데!’

나도 허겁지겁 따라 올라가보니 박쥐는 이미 아들내미가 자고 있는 방에서 휘휘 날고 있었다. 비상사태다. 이때부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호 본능인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고 눈에 확 불이 켜지며 초 집중 상태가 되었다.

“빨리 아이 안고 내려가!”

와이프에게 꽥 소리를 질렀고, 일단 둘을 1층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박쥐가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안에서 방문을 닫았다.

그래, 너랑 나랑 여기서 한판 하는거다.

마침 방에 뒹굴던 테니스 라켓이 보이길래 얼른 손에 쥐었다.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출구를 찾아 약간 낮게 날던 박쥐를 향해 강한 스매쉬를 날렸다.

“이야~~~압!!!!!!!!!!”

오밤중에 엄청난 기합 소리와 함께 라켓을 휘둘렀다. 의식적으로 낸 소리가 아니라 그냥 터져 나온거다. 박쥐 잡는데 기합소리가 왜 필요하겠나? 신기하게도 단 한번의 스트로크로 박쥐를 떨어뜨렸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난 테니스도 잘 못치고 운동신경이 대체로 별로인데. 테니스는 못쳐도, 아버지는 강하다 뭐 그런건가.

암튼 제대로 일격을 당한 박쥐는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방바닥에 뻗었다. 박쥐 vs 윤필구의 1:1 맞장 대결은 이렇게 싱겁게(?) 일단락 되었다. 날아다니던 박쥐는 꽤 커보였는데, 날개가 접힌 박쥐는 손바닥 크기의 반 정도 밖에 안될 정도로 정말 작았다. 이걸 잘 못 만졌다가는 큰 일 날 것 같아서 일단 상자로 그 위를 덮어서 가두고, 내일 집 주인을 불러서 보여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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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가다듬고 인터넷도 찾아보고 주변에도 물어보니, 박쥐는 떼지어 살기 때문에 한마리가 아닐거라고들 했다. 분명 집 한구석 어디선가 단체로 서식하고 있고, 밤이 되면 먹이를 찾아 밖으로 나갈거라는 거다. 확인해 보려면 저녁 해질 무렵 쯤 집 밖에 나와서 몇마리나 나가는지 관찰해 보라고 누가 귀띰해 줬다.

다음날 저녁 어스름 무렵 집 밖으로 나와서 지켜 봤더니, 과연…!

다락과 연결된 작은 환기구 같은 틈새로 뭔가 납작한 검은 물체가 쉬익~ 빠져 나온다. 2-3초 지나니 바로 또 쉬익, 쉬익~! 한번 나오기 시작하니 쉴새 없이 나온다. 마치 우주선에서 작은 전투기가 연속으로 출격하는 모양새다. 한 50마리 정도 세다가 포기했다. 재미있는건 옆집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저 집 주인은 저걸 알고 있으려나.

집주인이 불러준 pest control (해충 방제) 사람들이 집으로 왔는데, 이들이 해준 일이라곤 박쥐가 나가는 출구에 일종의 one-way exit 장치를 단 것 뿐이였다.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할 수 있고 다시 들어오지는 못하게 막는 장치인데, 저녁에 집 밖을 나간 박쥐가 다시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셈이였다. 내 기분 같아서는 화염방사기를 들고 다락에 가서 박쥐를 다 불살랐으면 좋겠는데, 박쥐를 마구 죽이는건 불법이라고 죽일 수는 없댄다 (생태계 보호).

젠장.

그 장치를 설치한 날 밤이 최악이였다. 제대로 설치가 안 되었는지 다락에 있던 박쥐들이 아예 밖으로 나가질 못한 것이다. 다락에 갇힌 박쥐떼가 끼익 끼익 온갖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그 공포스런 굉음은 아래층 까지 들렸고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다락문은 철저히 봉쇄했지만, 행여 떼지어 나오기라도 한다면 바로 괴기영화 찍는거다.

가족들은 1층으로 대피해 있었어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놈들이 날개를 접으면 몸체가 워낙 얇고 작기 때문에 어디 틈만 있으면 집안으로 침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텔로 피신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시간도 자정 근처여서 그 시간에 아이들 들쳐업고 어디 가기도 좀 애매했다. 그냥 내가 테니스 라켓을 들고 TV를 보며 밤을 새기로 했다.

그날 밤에 결국 박쥐가 2마리 정도 더 집안에 출몰했다. 한마리는 잡았고 한마리는 문밖으로 내보냈다. 첫 대결에서 처럼 단칼에 잡지는 못했지만 몇 번 보니 나름 차분하게 대처하게 되었다. 당연하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눈코입이 다 보이는데, 정신건강을 위해서 안보는게 나을뻔했다.

결국 그 집에서는 3주도 못 살고 이사를 나왔다. 엄청난 임무를 수행한 테니스 라켓은 어쩔수 없이 쓰레기통으로 직행.  잠도 잘 못 잔 상태에서 1달안에 이사를 두번 하려니 엄청 피곤했고 내 MBA 생활은 이렇게 시작부터 아주 드라마틱 했다 ㅎㅎ. 그래도 새로 이사간 아파트에서 2년동안 다른 여러 학우들과 아주 친하게 자주 어울릴 수 있어서 돌이켜 보면 잘 된 일 같기도 하다.

박쥐는 여러 병을 옮길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동물이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 배트맨 영화도 안 본다 난.

벤처 허생전, Circa 2019

허생은 성수동에 살았다. 곧장 중량천 밑에 닿으면, 뚝섬역을 지나 헤이그라운드 건물이 서 있고, 서울숲을 향하여 허름한 오피스텔이 있었는데, 주변 공장의 소음과 먼지를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테크크런치 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회사 외주 개발 일을 받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창업을 하지 않으니, 테크크런치는 읽어 무엇 합니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BM(역자주: 비지니스 모델)을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외주 개발 일이라도 못 하시나요?”

“외주 개발 일은 본래 배우지 않았는 걸 어떻게 하겠소?”

“그럼 온라인 쇼핑몰은 못 하시나요?”

“쇼핑몰은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BM만 파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외주일도 못한다, 쇼핑몰도 못 한다면, 유튜브라도 못하시나요?”

허생은 맥북을 닫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BM 공부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인제 칠 년일걸…”

하고 획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생은 성수동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테헤란로로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누가 강남에서 제일 부자요?”

손씨(孫氏)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 손씨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허생은 손씨를 대하여 길게 읍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고 하니, Series A로 100억을 투자해 주시기 바랍니다.”

손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100억을 카뱅으로 송금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손씨 회사의 심사역들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유행 지난 롱패딩에서는 튿어진 구멍사이로 깃털들이 너덜너덜하고,  액정 깨진 아이폰 5를 쓰고 있었으며, 코에서는 맑은 콧물이 흘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IR도 없이 100억을 그냥 쏘고, 사업자 등록증도 안 챙기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손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펀딩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비전을 대단히 선전하고, 레퍼런스를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행색은 허술하지만, 피칭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엑시트 없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투자 안하면 모르되, 이왕 100억 주는 바에 사업자 등록증은 받아서 무엇을 하겠느냐?”

허생은 100억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판교로 내려갔다. 판교는 서울과 경기도 창업자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테크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프론트엔드 개발자, 백엔드 개발자, 풀스택 개발자며, 디자이너 및 QA 엔지니어를 모두 두배의 연봉으로 불러들였다. 허생이 판교 인력을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모바일 앱 버그를 못 잡는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허생에게 엔지니어를 내주었던 카카오 같은 회사들이 도리어 열배의 값을 주고 그들을 재고용 하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100억으로 온갖 인력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 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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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늙은 타다 운전사를 만나 말을 물었다.

“바다 밖에 혹시 스타트업 할 만한 동네가 없던가?”

“있습지요. 언젠가 비행기를 타고 동쪽으로 10시간을 날아가서 가주(加州, 캘리포니아) 라는 동네에 닿았습지요. 아마 오레곤과 멕시코의 중간쯤 될겁니다. 야자나무와 레드우드가 제멋대로 무성하고, 파타고니아 조끼를 입은 VC들이 떼지어 놀며, 팀 쿡을 길거리에서 봐도 사람들이 놀라지 않습니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자네가 만약 나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면 함께 부귀를 누릴 걸세.”

라고 말하니, 운전사는 규제를 탓하며 인천공항까지만 데려다 주기로 승낙했다.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동쪽으로 가서 그 땅에 이르렀다. 허생은 우버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실망하여 말했다.

“모든 물가가 서울보다 두배는 비싸니 무엇을 해 보겠는가? 날씨는 연중내내 좋으니, 단지 골프는 즐길 수 있겠구나.”

“이 동네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대체 누구와 골프를 친단 말씀이오?”

우버 드라이버의 말이었다.

“스코어만 좋으면 사람이 절로 모인다네. OB가 날까 두렵지, 사람이 없는 것이야 근심할 것이 있겠나?”

이 때, 샌프란에 수천명의 홈리스 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샌프란 도시에서 이들에게 거처를 제공하려 하였으나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홈리스들도 AI에 일자리를 뺏겨 배고프고 곤란한 판이었다. 허생이 홈리스 우두머리를 찾아가서 달래었다.

“천명이 우버 운전을 해서 벌면 모두 얼마지요?”

“일 인당 한시간에 20불 정도를 벌지요”

“모두 스마트폰은 있소?”

“없소.”

“자동차는 있소?”

홈리스들이 어이없어 웃었다.

“자동차가 있고 스마트폰이 있는 놈이 무엇 때문에 홈리스가 된단 말이오?”

“정말 그렇다면, 왜 아이폰도 사고, 토요타 프리우스를 사서 우버 운전수가 되려 하지 않는가? 그럼 홈리스 소리도 안듣고 살면서, 집에서는 포트나이트(Fortnite)의 낙이 있을텐데.”

“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돈이 없어 못 할 뿐이지요.”

허생은 웃으며 말했다.

“실리콘밸리에 살면서 어찌 돈을 걱정할까? 내가 능히 당신들을 위해서 마련한게 있소. 내일 이메일을 열어보면 스톡옵션 계좌가 있으니, 마음대로 가져가구려.”

허생이 언약하고 팔로알토로 내려가자, 홈리스들은 모두 그를 미친 놈이라고 비웃었다.

이튿날, 홈리스들이 이메일을 열어보니, 과연 허생이 에어비앤비 스톡옵션 30만주를 뿌린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해서 허생 앞에 줄이어 절했다.

“오직 멘토님의 명령을 따르겠소이다.”

이에, 홈리스 들이 다투어 스톡옵션을 자기 구좌로 이체하려 하였으나, 신용 한도 때문에 100주 밖에 못했다.

“너희들, 신용 한도가 100주 밖에 안되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인제 너희들이 개발자가 되려고 해도 신용불량자의 장부에 올랐으니, 갈 회사가 없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니, 한 사람이 100주를 팔아서 개발자 한명씩 꼬셔오너라.”

허생의 말에 홈리스들은 모두 좋다고 흩어져 갔다.

허생은 1천명 인력이 1년동안 버틸 펀딩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홈리스 들이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  개발자들과 함께 팔로알토로 내려가 위워크에 입주했다. 허생이 홈리스들을 몽땅 쓸어 가서 샌프란 도시 안에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들은 리눅스를 깔고 코딩을 시작했다. AWS클라우드를 연동하고, Slack으로 소통하며, JIRA로 버그를 관리했다.  개발 말고 다른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속도가 빨라서 3분기 만에 베타 버전이 나왔다. 허생은 소스코드를 모두 USB에 담아 구글로 가져가서 팔았다. 구글은 시총이 천조나 되는 회사였다. 비전펀드 사태로 마을에 불경기가 들어서, 로펌 비용을 제하고 간신히 1조를 얻게 되었다.

허생이 탄식하면서,

“이제 조그만 유니콘 하나 만들었구나.”

하고, 이에 직원 1천명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창업할 때엔 먼저 비지니스 모델을 증명하고 J커브 매출을 그리려 하였더니라. 그런데 펀딩은 부족하고 유니콘만 만들라고 하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 다만, 아이들을 낳거들랑 오른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하루라도 먼저 난 사람이 새모델을 쓰도록 양보케 하여라.”

나머지 소스코드를 모두 지우면서,

“개발하지 않으면 버그 잡는 이도 없으렷다.”

하고 루트 디렉토리에서 “rm -rf” 명령어를 타이핑 하며,

“하드를 복구해서 소스코드 주워갈 사람이 있겠지”

했다. 그리고 파이썬(역자주: 컴퓨터 언어)을 할 줄 아는 자들을 골라 모조리 함께 비행기에 태우면서,

“이 나라가 AI에 지배되는건 막아야지.”

했다.

+++

허생은 한국으로 돌아와 각종 임팩트 펀드에 투자했다. 그러고도 1천억이 남았다.

“이건 손씨에게 갚을 것이다.”

허생이 가서 손씨를 보고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묻자, 손씨는 놀라 말했다.

“그대의 허름한 롱패딩이 그대로이니, 혹시 Series A 펀딩을 다 날리지 않았소?”

허생이 웃으며,

“운영수수료로 조르지오 아르마니 양복을 사 입는 것은 당신들이나 하는 일이오. 100억이 어찌 창업가정신을 살찌게 하겠소?”

하고 1천억을 손씨에게 내놓았다.

“내가 린스타트업의 방법론을 몰라, 당신에게 덜컥 100억을 펀딩 받은게 부끄럽소.”

손씨는 대경(大驚)해서 일어나 절하여 사양하고, 투자금을 보통주로 전환하겠노라 했다. 허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당신은 나를 바지사장으로 보는가?”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 버렸다.

손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허생이 성수동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한 요기요 배달원이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손씨가 말을 걸었다.

“저 조그만 오피스텔이 누구의 집이오?”

“허생원 댁입지요. 가난한 형편에 웹서핑만 좋아하더니, 하루 아침에 집을 나가서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고, 시방 부인이 혼자 사는데 별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 같지 않더이다.”

손씨는 비로소 그의 성이 허씨라는 것을 알고, 탄식하며 삼성동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튿날, 손씨는 성수동 그 집에 찾아가서 돈도 돌려 주며 VC 업계로 입문을 권유했으나, 허생은 모두 거절하였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1조로 엑시트 하고 천억만 가져왔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어드바이저로 이름이나 올려주고 법카나 하나 주도록 하오. 일생을 그러면 족하지요. 왜 포트폴리오로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손씨는 허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손씨는 그 때부터 허생의 오피스텔에 양식이 떨어질 때쯤 되면 샛별배송 음식들을 주문해 주었다. 허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과도한 포장용기가 오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분리수거를 맡기면 어찌하오?”

하였고, 혹 발렌타인 21년산을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서로 취하도록 마셨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 날, 손씨가 5년 동안에 어떻게 1조를 벌었던가를 조용히 물어 보았다. 허생이 대답하기를,

“그야 가장 알기 쉽지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외국과 언어가 통하질 않고, 육지로 다른 나라와 통하지 않아서 창업팀들이 다 제자리에서 머물지요. 무릇 100억은 적은 돈이라 Pre-IPO 딜은 독점할 수 없지만, 그것을 열로 쪼개서 10억을 열군데 투자할 수는 있겠지요. 단위가 작으면 굴리기가 쉬운 까닭에, 한 건에서 실패하더라도 다른 투자건에서 재미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은 보통 수익률 맞추기에 급급한 조그만 VC들이 하는 짓 아니오? 대개 100억이면 족히 한 섹터의 핫 딜들은 슬그머니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은 벌 수 있는데, 이는 벤처 생태계를 해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사모펀드(PE)들이 만약 나의 이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

“처음에 내가 선뜻 100억을 투자할 줄 알고 찾아와 피칭 하셨습니까?”

허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내게 꼭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모태펀드를 받은 VC들은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내 스스로의 아우라로 족히 100억은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투자 결정은 투심에 달린 것이니, 낸들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므로 내 말을 믿어주는 심사역은 복 있는 사람이라, 이 딜을 엑시트하면 승진할텐데 어찌 투자하지 않았겠소? 이미 Series A 후에는 마일스톤만 보고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 마다 성공했던 것이고, 만약 내가 사사로이 내 연봉이나 올리려 했다면 성패는 알 수 없었겠지요.”

+++

손씨는 본래 청와대 창업지원실 김실장과 잘 아는 사이였다. 김실장이 손씨에게 유니콘 창업자 출신 중 쓸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손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김실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소인이 그분과 3년동안 술 마시면서도 여태껏 페북 친구도 못 되었습니다.”

“그는 기인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밤에 김실장은 수행비서들도 다 물리치고 손씨만 데리고 성수역에서 내려 전동킥보드를 타고 허생을 찾아갔다. 손씨는 김실장을 오피스텔 건물 밖에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김실장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한쪽 구석에서 리니지만 하는 등 딴청을 피우며,

“당신이 들고 온 발렌타인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취중 게임을 이어갔다. 손씨는 김실장을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재촉하였으나, 허생은 렙업에만 몰두하다가 야심해서야 비로소 김실장을 안으로 불렀다.

김실장이 들어왔지만 허생은 명함도 건네지 않았다. 김실장은 몸 둘 곳을 몰라하며 애꿎은 리멤버 앱만 만지작 거렸다. 김실장이 범정부 차원의 유니콘 육성 아젠다를 설명하자, 허생은 불편한 표정으로 노이즈캔슬링 에어팟 프로를 귀에 끼며 말을 끊었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몇급 공무원이냐?”

“1급이오.”

“그렇다면 너는 나라의 신임받는 신하로군. 내가 이해진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대통령께 아뢰어서 삼고초려를 하게 할 수 있겠느냐?”

김실장은 고개를 숙이고 폰으로 이해진 의장의 네이버 지분 가치를 검색하더니,

“어렵습니다. 플랜 B를 듣고자 합니다.”

했다.

“나는 원래 플랜 B라는 것은 모른다.”

하고 허생은 생까다가, 김실장의 간청을 못 이겨 말을 이었다.

“너는 국회에 건의하여 종부세를 인상하고, 재벌기업의 세금을 인상해 팁스 자금이 바닥난 스타트업에 나누어 줄 수 있겠느냐?”

김실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4차 산업혁명을 이루려면 남의 나라를 벤치마킹 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중국 대륙은 텐센트와 알리바바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서 딥러닝, 빅데이터, 핀테크를 필두로 온 IT 산업을 호령하는 터이다. 진실로 우리 자제들이 중국으로 유학가서 인공지능 박사를 받도록 장학금을 줄 것과, 위챗의 안면인식 기술 수입을 허하면, 저들도 반드시 자기네에게 친근하려 함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과학고 출신의 영특한 자제들을 가려 뽑아, 중국 옷을 입히고 유학시켜 저 나라의 실정을 정탐하는 한편, 저 땅의 마윈, 마화텅과 일촌을 맺는다면 천하를 뒤집고 미, 중, 일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고, 못 되어도 IT 강국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김실장은 힘없이 말했다.

“과학고 영재들은 모두 의사가 되려하는데, 누가 중국 옷을 입고 중국에 유학을 하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엘리트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금수저로 태어나 국가 고시만 준비하면서 자칭 엘리트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학벌이나 스펙을 중히 여기는 것은 80년대 습속에 지나지 못한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미래에 먹고 살려 한단 말인가?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만들기 전에 아타리(Atari)에서 인턴생활을 마다하지 않았고, 빌 게이츠는 하바드를 때려친 뒤 IBM에 머리를 숙이고 MS-DOS 납품한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해 청년 창업을 육성한다고 하면서, 있는 규제들도 과감히 철폐해야 하는 판국에 없는 규제까지 만들면서 유니콘을 기대한단 말이냐? 내가 세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받는 신하라 하겠는가? 너 같은 자는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얼음물과 양동이를 찾았다. 김실장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비상계단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오피스텔은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