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를 키우지 않는 사회

얼마전 페이스북에서 유럽계은행에 다니는 딸과 한국계 은행에 다니는 아들을 비교한 최동석님의 글을 접했다. 이 글에서 내 눈에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유럽계 은행에서는 직원들이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반면, 한국계 은행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였다. 그 글에 따르면 딸이 재직중인 유럽계 은행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타 부서로 인사이동이 없기 때문에 같은 분야에 장기 근속할 수 있고 어느새 ‘압도적인 전문가’가 된다고 한다. 반면 아들이 다니고 있는 한국계 은행에서는 2-3년마다 일어나는 보직순환제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제대로된 업무 습득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게 비단 은행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계열사를 여럿 거느린 한국의 재벌기업도 비슷한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가끔 신문에도 나는 재벌 기업들의 사장단 인사나 그에 따른 임원들 이동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반도체쪽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이 갑자기 소프트웨어 회사 사장으로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IT쪽에 계셨던분이 IT와는 상관없는 물류나 건설회사 같은데로 이동하기도 한다. 탑레벨이 그렇게 움직일 때 ‘자기 사람’을 데리고 다니다 보니 그밑의 실무진도 동일한 운명이다. 당사자의 역량이나 희망보다는, 그때 그때 그룹의 사정에 따라 옮겨다니며 ‘배치’ 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회사 자체를 옮기는 보직순환도 허다하니, 회사 내에서 부서 옮겨다니는 건 이야기거리도 안될거다. 주위에 종종 미국 파견근무나 장기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분들을 보는데, 그 중 상당수는 자신이 어느 부서에 ‘발령’ 날지 모르는 채로 귀국한다. 이렇게 여러 부서를 돌다보면 여러가지를 겉핥기 식으로 배울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 분야에 식견과 비전을 가진 전문가는 결코 될 수 없다. 그리고 본인의 전문성 결여에서 오는 왠지 모를 불안감은 성과보다 인간관계 다지기에 더욱 목을 매게 만든다.

언론사는 또 어떠한가?  아는 기자님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기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한 기자가 한 분야에서만 10년이상 파고 들어야 깊이 있는 취재나 기사가 나올 법한데, 국내 언론사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원천봉쇄 되고 있다.  대부분 기자들이 2-3년을 주기로 부서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부에서 3년 있다가 막 국제부로 넘어온 기자에게 시리아 내전의 깊은 의미를 우려낸 기사를 기대할 수는 없다.  뉴욕타임즈나 테크크런치 같은 매체를 보면 기자의 깊은 지식과 통찰력에 감탄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사람들은 이미 그 분야를 아주 오랫동안 파헤친 사람들로서 전문가로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다. 당연히 해당 업계의 인맥도 좋아서 고급 정보 제보도 받고, 남들이 하기 어려운 취재나 인터뷰도 가능할 것이다. 내 생각에 한국 기자가 머리가 딸려서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수준 낮은 기사가 생성되는게 아니다.  그럴 환경이 아예 주어지지 않는것 같다.

공무원 조직은 또 어떠한가? 공무원들의 보직 변경은 밖에서 보기에도 정신이 없다. 도대체 같은 자리에 2-3년 이상 있는 사람을 본 일이 드물다. 정치적인 자리인 장/차관 자리야 그렇다고 쳐도, 실무자/담당자 들도 계속 자리가 바뀌기 때문에, 바깥 입장에서 보기엔 계속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 부담과 비효율이 생긴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해야 ‘공무원 비리’를 차단할 수 있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같은 사람과 계속 일할때 서로 알고 있는 일의 맥락이나 전문성은 큰 효율을 가져온다. 원래 하던 사람이면 간단히 전화 한통이면 끝났을 일을, 새 담당자가 오면 일단 만나서 얼굴 보여주고, 히스토리 다시 설명해주고, 이걸 왜 해야하는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다시 설명과 설득을 반복해야 했던 경험을 많이들 해봤을거다. 공무원들의 돌고도는 인사이동은 내부 역량의 전문성 결여라는 문제와 민간 사업자의 비효율을 동시에 초래한다.

이렇듯 끊임없는 자리이동을 거치고나면 조직내 가득한건 generalist (다방면을 많이 아는 사람, 일반 관료)요, specialist (전문가)는 가뭄에 콩 나듯 하게 된다. 우리나라 경제가 고속 성장을 하던 시절에는 전문성이 다소 떨어지는 제품이나 서비스도 내수 시장에서 그럭저럭 팔렸으니 먹고 살만 했다. 하지만 국가간 장벽이 점점 낮아지는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전문가 부족 현상은 결국 우리나라의 국제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까 우려스럽다. 위에서 인용한 최동석님 글의 예만 봐도 쉽게 감이 온다. 도대체 우리나라 금융기관중에 국제 경쟁력을 가진데가 과연 있을까? 금융시장이 개방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지금이라도 정부와 기업들은 전문가를 많이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을 좀 적극 도입했으면 좋겠다. 고도의 지식사회에서 우리를 먹여 살릴 사람들은 그들이다.

 

++ +

사족: 이런 글을 쓸때면 누워서 침뱉기 같아서 사실 마음이 불편하다. 전쟁을 극복하고 기적같은 경제성장을 이룬 우리나라지만, 당연히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 기준으로 바라보면 아직 부족하고 비합리적인 것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과 답답한 마음에 이런 글을 토해내게 된다.

 

 

 

 

6 thoughts on “전문가를 키우지 않는 사회

  1. constructive criticism입니다. 한국에서는 외국계회사에서만 일해서 한국 회사의 고질적 문제점을 못알아챘죠. 진짜 전문성의 부재가 심각한 문제인거 같아요. Ownership 관련해서도 자기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니, 일에 열정을 쏟기도 싫어 지는 것 같구요. 동기부여가 점점 떨어진다고나 할까…

    1. 정부나 기업에서 뭔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분들이 이런 비판에 귀를 열어주시면 좋을텐데 그런분들은 온라인에서 시간을 안보내시겠죠 ㅜㅜ

  2. 전 신참들이 Generalist가 되는 것은 찬성입니다. 오래근무하신분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가지고 다른 분야를 공부하여 창의성을 뽑아야 한다 보고요.
    어쨌든 한국이 전문가를 키우지 못하는 사회는 유럽과 비교해도 자명한 사실임엔 동감합니다.

  3. 글쎄요..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존재하는거 같네요. 보직순환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제도를 풀어나가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방식이 문제가 아닐런지요.. 저희는 오히려 한사람이 너무 장기집권?함으로 인한 줄서기와 라인관리, 그리고 변화에 둔감함 등이 불만요소인지라.. 어떤 제도이든 그걸 풀어가는 조직의 의지와 운영의 미가 중요하단 생각입니다.

  4. 이건 아닌것 같아요. 저도 인사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는데 한곳에서만 일한다고 전문가가 되는건 아닌것 같아요. 여러군데를 알아야 편협한 생각을 하지않고 업무에 효율이 좋은 것 같아요. 물론 개발이나 sw분야는 한 업무만 하여 전문가가 되는 것이 좋죠. 그리고 위의 예로 완전 고위직은 전문가보단 경영자로서 사실 스페셜리스트보다는 제네럴리스트가 낫죠. 왠지 글쓰신 분은 자기 분야만 보셔서 그런 것 같은데… 물론 스페셜리스트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보통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은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하고 잡포스팅같은 제도에 욕구가 엄청 많으세요. 참고로 인사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1. 아 저 또한 제너럴리스트를 반대한다는 취지는 절대 아닙니다. 조화를 이루는게 좋겠죠.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다수의 인재가 제너럴리스트가 되는 트레이닝 받고 있다는건 문제라고 봅니다. 한곳에서 일한다고 전문가가 되지는 않겠지만, 순환보직을 2-3년 주기로 도는 사람은 절대 전문가가 될수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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