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충격이였다. 나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번 대회에는 이세돌의 압승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니, 내심 그러길 바랬다. 바둑도 모르고 인공지능도 잘 모르지만, 왠지 아직까지는 인간대표가 기계대표를 확실히 꺾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난생 처음 관람한 대국이였다. 바둑에 관심이 없으니 평소에 대국을 시청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이건 보고 싶었다. 평소 축구 안보는 사람도 월드컵은 보듯이 말이다. 여러 해설을 듣고 싶어서 영어 중계방송과 한국어 방송을 번갈아가면서 지켜봤다. 한국어 방송에서는 대국 중반쯤 알파고가 어이없는 실점을 두는 바람에 이세돌이 확실히 승기를 잡았다고 반복했다. 그런데 영어 방송 해설자들은 그런말이 없었다. 그들은 전세는 막상막하이고 가슴이 떨려올 정도의 접전이라고 말했다. 바둑을 볼 줄 모르니 누구 말이 맞는지 알길이 묘연했다.
그런데 대국 후반으로 가니 이제 해설자들이 집을 세기 시작한다. 대충 윤곽이 보이나 보다. 한국어방송의 해설을 맡은 유창혁 기사는 이때쯤부터 말수가 줄어들며 상당히 당혹스런 눈치다. 난 이때 확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아… 무슨 일이 났구나’
영어방송 해설자들이 그래도 아직 스코어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상태라고 하니, 대국이 꽤 이어질 줄 알았다. 미국 서부시간으로는 자정 근처 시간이라 끝까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그런데 이세돌 기사가 갑자기 돌을 내려놓으며 기권했다. 영어방송 해설자들도 사뭇 놀라는 눈치다. 아마 좀 더 해볼만 하지 않나라고 생각을 했을텐데, 프로기사 이세돌의 생각에는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난생처음 관람한 대국은 기계의 승리로 끝났다.
중계방송은 끝났지만, 뭔가 다른 세상 chapter 1에 온것 같아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인간 대표의 완패’라는 충격과 이제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기계보다 잘 할 수 있는게 뭐가 남았다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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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도 없고 마차도 흔치 않았던 시절에는 장거리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꽤 추앙을 받았을것 같다. 사냥을 할때도 유리했을 테고, 멀리 소식을 빨리 보내는데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반면에 현대의 마라톤 선수는 고대 사람들 보다 훨씬 빨리 뛰겠지만, 마라톤 선수가 기록을 단축한다고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자동차라는 기계의 힘을 빌리면 인간의 다리보다 몇십배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의 달리기 실력은 우리 보통 일상생활에는 irrelevant 해진지 오래다.
인간의 ‘계산 능력’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옛날에는 복잡한 계산을 척척 해내는 사람이 회사마다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은행같은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일반 회사들도 온갖 회계장부 정리하려면 누군가 이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처리해내야 했을테니, 이런데 재주가 있는 사람은 돈을 잘 벌었을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도 초등학교 저학년때 주판학원을 다녔다. 그때만해도 은행에가면 창구 직원이 주판도 가지고 있었던것 같다. 컴퓨터가 나오면서 이런건 이제 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가 되었다. 이미 인간의 계산 능력은 구멍가게에서 쓰는 3천원짜리 계산기보다 못하다.
기계보다 달리기도 느리고 계산도 한참 느리지만, 인간으로서 그동안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건 고난이도 문제가 있을때 이를 경험에서 오는 직관이나 상상력등을 총동원해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아니였을까. 인공지능에서 바둑이 난제였던 이유는 경우의 수가 극히 많아서라고 들었다. 그러니 각각의 수보다 전체 판세를 읽어 ‘직관(intuition)’을 이용해 전략적 포석을 둘 줄 아는 인간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이 바둑이라고 믿어왔던 거다.
직관이라는 것을 잘 살펴보면 결국 오랜기간의 경험(=데이터)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패턴인식을 하고 그에 따른 판단인 셈이다. 나도 내 직업(벤처캐피탈)에서 직관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투자를 결정할때 회사의 매출같이 수치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창업자의 인생 스토리라든지, 업을 대하는 태도라든지, 공동창업자간의 끈끈함 같은 부분은 정량화 하기 힘들어서 결국은 내 경험 (창업자를 많이 만나면서 학습한 것)과 패턴인식에 기대게 된다. 아마 많은 환자를 대하는 의사들도 나름의 직관적인 감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직관은 당연히 정확할 수 없고 틀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기계가 따라오기 힘든 인간 고유의 인지능력이라고 대부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직관이라는 것도 알고리즘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게 이번 알파고-이세돌 대국에서 증면된 셈이다. 아직 5전중 1승이지만, ‘직관적 판단력’이 크게 작용하는 게임에서 기계 대표가 인간 대표를 기권승으로 이긴것은 정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머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직관력도 계산능력이나 달리기실력 같은 신세가 되는게 아닌지 모르겠다. 섬세한 판단을 요구하는 일 (환자의 치료방법을 결정하거나, 투자대상 회사를 고르거나 등)은 결국 모두 기계가 담당하고, 인간의 직관력은 risk가 낮은 보드게임 같은데서 ‘스포츠’ 용도에나 쓰이게 되는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인간이 머리써서 하는 것중에 기계보다 잘 하는게 뭐가 남을까? 창의력? 상상력? 이미 기계가 소설도 쓰기 시작했고 작곡도 한다는데? 우리 아이들 세대에는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까?
답은 잘 안떠오르고 질문만 잔뜩 생기는 그런 날이다. 오늘은 이세돌이 이겨줘야 잠을 좀 더 편히 잘 것 같다.
항상 글 잘 읽고 갑니다 ^^
그러고 보니 우리 어릴 때는 전자계산기와 주판의 계산대결 하면서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기억 난다.
대표님 글은 놓치지 않고 보는 편인데 페북 새 글 링크 따라 이제야 봤습니다. 그만큼 저도 충격이 컸나 봅니다ㅋ 이미 바둑 잘 두시는 분들의 의견을 많이 접하셨을테니, 그 때 제가 느꼈던 것 중 하나만 적습니다. 저도 바둑 잘 모르지만 중학교 때 아마추어 기사 수준의 친구 따라 조훈현 마지막 – 이창호 전성기 – 이세돌 처음 시기에 걸쳐 대국을 봤던 기억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창호 등장 때 반응이 알파고 나왔을 때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직관과 공격적인 성향이 대접받던 시기에 초반부터 계가(머릿속으로 끝까지 갔을 때를 상정하고 거꾸로 계산해서 수를 놓는)를 하는 강력한 기본기로 세계를 평정했었죠. 계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가뜩이나 머리 많이 쓰는 바둑에 지루한 쪽으로 더 머리를 써야하니 쉽게 따라할 수 없었는데, 당시에도 언젠가 인공지능이 바둑을 두는 세상이 오면 계가 때문에 후반으로 갈 수록 인간이 불리하지 않겠느냐는 쪽과 역시 인간의 직관을 따라올 수 없다는 쪽으로 갈려서 논박했던 기억이 나는 군요. 그 때는 사자랑 호랑이랑 싸우면 누가 이기냐인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무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