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들에게 보내는 월간 리포트 작성 요령

창업 초기 단계에서 투자를 받고 나면, 지속적으로 투자자들과 긴밀한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첫 단추는 ‘소통’이다. 투자자들은 기본적으로 회사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경영진이 알려주지 않으면 사실 쉽게 알기 어렵다. 그래서 규칙적인 월간 리포트 같은 것이 더 중요한 셈이다. 개인적인 엔젤 투자자건, VC같은 기관 투자자건 짤막한 회사 업데이트 이메일을 마다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그렇게 계속 정보를 제공하면서 지속적인 관심을유도하면 그 투자자가 회사를 위해 한가지라도 더 도와줄 확률이 높아진다.

아직 공식적인 보드미팅을 하기 전인 씨드단계 회사로서 어떻게 월간 보고서를 작성하면 좋을까? 아래는 내가 포트폴리오 회사들에게 보내달라고 하는 양식이다 (회사의 성격에 따라 한두가지씩 가감되긴 한다).

  1. 기본 metrics — 흔히 KPI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사용자수, 방문자수, 다운로드 수, 잔존율, 거래건수 등등 회사들마다 기본적으로 측정하는 metrics가 있기 마련이므로 이것을 공유
  2. 개발 진행상황 — 현재 개발 진행중인 프로젝트 진척상황을 공유. 어떤 프로젝트가 언제까지 마무리 될지 향후 계획도 포함하면 더 좋다
  3. 마케팅 & 영업 활동 — 우리의 제품을 알리고 팔기 위해 어떤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업데이트. 다른 업체와의 파트너쉽 같은 BD활동도 포함
  4. 신규 프로젝트 — 회사에 따라 새로운 시장이나 지역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고, 새로운 앱이나 게임을 준비하는 경우 등, 뭔가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있다면 어떤 내용인지 공유해 주면 좋다
  5. 리크루팅 활동 — 지난달 새로 영입한 사람이 있는지? 나간 사람은 있는지? 현재 뽑고자 하는 포지션은 어떤 것인지? (투자자들이 혹시 좋은 후보를 소개해 줄지도 모름)
  6. 재무 상황 — 재무제표를 전달해 주면 가장 좋지만, 그게 미처 준비가 안되더라도 아주 기본적인 내용은 추정치(estimate)라도 공유해 주어야 함
    • 월간 매출 (0이 아니라면 ^^)
    • 월간 비용 (인건비 이외에 큰 비용이 있으면 따로 설명)
    • 현금 밸런스 (이걸 알아야 runway 추정이 가능)
  7. 펀딩 활동 — 만약 펀드레이징을 하고 있다면 이에 대한 진척상황을 설명
  8. 종합 — 회사 전체 분위기는 어떤지, 특별한 고충은 없는지 등 위에서 캡처되기 힘든 이야기들을 곁들여도 좋다

대충 이 정도의 정보를 얻으면 경험있는 투자자의 경우 회사 상태를 금세 간파할 수 있게 되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주기가 쉬워진다. 내가 보통 요구하는 리포트 형식은 멋있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도 아니고 현란한 그래프가 있는 엑셀파일도 아니다. 위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간단한 이메일 한 통이면 된다. 그리고 그 이메일 작성하는데 아마 1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창업자 입장에서는 리포트 쓰는게 다소 귀찮을 수 있지만 회사와 본인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매달 한번씩 반강제로라도 회사를 잠시 돌아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니 말이다. 또 CEO로서 이런 작은 훈련이라도 거쳐야 나중에 회사가 성장해서 공식적인 보드 미팅을 할 때 좀 덜 당황하게 된다.

(빅베이슨의 경우 씨드단계 투자에서는 공식적인 보드미팅 대신 월간 리포트및 경영진과의 대면 미팅을 원칙으로하고, Series B 같은 후속 투자를 받게되면 공식 보드미팅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유도한다)

그냥 1년치 회사 운영비를 펀딩 받으면 안되는 이유

이런 상황을 한번 가정해 보자. 오늘 오후 6시에 인천공항에서 출국하는 비행기표가 하나 있다.  오늘 나의 일정은 비행기 시간으로 부터 역산으로 짜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이런 생각을 머리속으로 하게된다.

‘6시 비행기에 타려면 공항에 넉넉히 4시까지는 도착해야겠지? 체크인 수속하고, 보안 검색, 출국 심사 통과하려면 1시간 정도 걸릴테고, 탑승이 시작되는 5:30분까지 게이트앞에 가야하니 보안검색 줄이 길지 않다면 30분정도는 공항 라운지에서 잠시 음료수 한잔 할 시간이 있겠군. 공항에 4시까지 가려면 집근처 공항버스를 3시에는 타야할테니, 마지막 미팅을 2시에는 끝내고 집에와서 짐챙겨서 나가는 걸로 하자.’

이런 상식적인 역산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쉽게 이해가 된다. ‘6시 출발’ 이라는 목표달성을 위해 ‘4시 공항 도착’과 같은 중간단계 마일스톤이 존재하고 그에 따른 시간 계획을 세우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스타트업이 펀딩을 받을때도 목표와 마일스톤에 근거한 역산을 해 볼 필요가 있다. 회사마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있고, 그 중간에 구체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자체 마일스톤이 있게 마련이다. 펀딩은 이에 맞물려서 가야한다. 즉, 구체적인 마일스톤을 달성하기 위한 필요 재원으로서 펀딩을 받는 것이다.

마일스톤은 회사의 성격과 단계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회사는 제품 개발 완료일 수도 있고, 사용자 수 100만 돌파일수도 있으며, 자체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일 수도 있다. 마일스톤이 무엇이건간에 스타트업 펀딩은 보통 한번으로 끝나는게 아니라서, 마일스톤에 근거한 펀딩이 더욱 중요하다. 씨드 단계에서 펀딩을 받아 특정 마일스톤을 달성하고 나면, 그 실적을 바탕으로 Series A, B와 같은 다음단계 펀딩을 또 유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펀딩 규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다음 마일스톤을 달성하는데 얼마만큼의 자금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일스톤을 달성했을때 우리회사가 과연 후속투자 유치가 가능하겠느냐를 미리 가늠해봐야 한다 (물론, 손익분기점을 넘겨서 후속 펀딩이 필요없을 때도 있지만). 쉽게말해서 펀딩 받은 금액을 다 소진했을때 회사가 두가지 중 하나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손익 분기점을 넘겼거나, 훌륭한 마일스톤을 달성해서 후속펀딩에 매력적인 회사가 되었거나.

가상의 예를 들어보자. 수퍼모바일이라는 스타트업은 목표가 3년안에 월매출 10억을 내면서 이익을 내는 회사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2단계 펀딩계획을 아래와 같이 역산으로 짜 볼 수 있다. 월매출 10억을 만드려면 사용자 3백만은 되어야하고, 18개월후 중간단계 마일스톤으로는 우선 100만 사용자를 모으는 것이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지금 1차적으로 필요한 예상 자금은 약 7~8억원이니, 약간 버퍼를 두어서 10억원을 펀딩받으면 무난한 편이다. 18개월후 100만 사용자 마일스톤을 찍고 그 지표를 근거로 40억규모의 Series A를 투자받아서 부가기능 구현및 마케팅을 통해 월매출 10억에 도전한다. 뭐 이런식이다. 아까 비행기 시간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역산’의 관점에서 볼때 막연히 “향후 1년치 정도 회사 운영자금을 펀딩 받으려한다”는 별로 좋은 계획이 아니다.  1년후 회사 모습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년후 돈을 소진했을때 멋진 마일스톤을 달성하면 다행이겠지만, 어정쩡한 상태 (예를들어, 계속 앱 개발중) 라면 아주 골치아픈 상황이 발생한다.

‘마일스톤에 근거한 펀딩 계획’ — 오늘은 이말이 하고 싶었다.

사족: 물론 펀딩받기 위해 사업을 하는건 아니다.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사업을 하는 것이고, 펀딩이라는건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 혹은 촉매제 역할일 수 있으며, 때로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

투자자 미팅에 몇명을 데리고 갈 것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창업한지 석달째. 지인의 소개로 투자자와의 미팅이 잡혔다. 대표인 나 혼자 가야 하나? 공동창업자 모두 데려가야 하나? 아니면 우리 CTO 한명만 같이 갈까?

위와 같은 고민을 살짝 해본 창업자들도 많을 것 같다. 뭐 정답은 없겠지만, 이런 미팅을 늘상 많이 하게 되는 투자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대표 1명 혹은 대표가 포함된 2명이 미팅에 참가하는걸 선호한다.

개인적으로 편하고 부드러운 1:1 대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생긴 성향일수도 있지만, 대표 한분만 상대할 경우 이야기의 맥락이 끊기지 않고 깊이 있는 대화를 하게된다. 이런 경우 자연 스런 대화체의 Q&A로 파고들 수 있게되어 몰입도도 높고, 상호 의견 교환도 쉽다. 대표님의 성향이나 기질에 대한 파악도 좀 더 용이하다.

대표가 원할경우, 공동창업자나 CTO같은 핵심인원 1명 정도는 더 미팅에 데리고 와도 괜찮다고 본다.  이경우에도 주요 피칭이나 대화는 대표가 이끌어가고, 대표가 대답하기 힘든 구체적인 부분 (예를 들어, 기술적인 질문)만 같이 동행한 사람이 도와주면 금상첨화다. 말하기의 분배를 대표와 CTO가 각각 8:2, 혹은 9:1 정도로 나누어주면 큰 혼란 없이 대화가 잘 이어진다.

한 회사에서 3명 혹은 4명 이상이 오게 되면 ‘얼굴 도장’ 이외에 큰 의미가 없다. 그 사람들이 다 미팅에서 말하기 시작하면 너무 혼란스럽고, 말없이 조용히 있을 것이면 투자자입장에서는 그분을 첫미팅때 꼭 봐야할 이유가 없다 (그분은 참관하는 것만으로 배우는게 있을테지만).

수많은 피칭 미팅 경험에서 봤을때, 문제스러운 경우는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두명이 와서 서로 경쟁적으로 피칭하는 것이다. 한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한명이 말을 이어간다. 서로 존재감을 내세우려는 것 같다. 방금 끝난 말과는 다소 다른 맥락의 말도 막 튀어 나오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정신이 없다. 최악의 경우는 투자자 앞에서 자기팀의 발언을 ‘그건 아니고요’ 라고 부정하며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경우다. 이럴경우 투자자는 깊은 혼돈에 빠지게 된다. 설령 공동대표라고 하더라도 누가 주도적으로 피칭을 하고 누가 보조 역할을 할지 미리 정하는 편이 낫다.

두번째로 문제되는 경우는 3명, 4명이 우르르 몰려와서 산만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다. 4명이 오면 2명정도는 미팅중에 딴 생각하고 있는게 얼굴에 보이고, 스마트폰 확인 등의 딴 짓을 시작하게 된다. (지루해 하는 그들을 보면 왠지 미팅을 빨리 끝내줘야 할 것 같다 ㅜㅜ) 심지어는 이들 중에는 전화 걸거나 받으러 미팅룸을 들락날락하는 경우도 있는데, 결국 대화의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VC들도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경우 많은것 인정하니 우리도 반성).

그래서 결론은 첫미팅때 1명 혹은 꼭 필요한 2명만 참석하고, 나머지 핵심인력은 추후미팅에서 VC가 요구하면 소개해도 늦지 않다고 본다.

투자 받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벤처 캐피탈을 하다 보니 이런 질문을 참 자주 받는다.

“투자 받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처음 투자를 유치하는 사람으로선 참 궁금한 부분이고, 중요한 질문인데 정확한 답은 없다. 아주 짧게 답하자면 ‘2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끝까지 읽기 힘든 분은 여기까지만 읽어도 된다 ^^.

좀 더 길게 답하자면 투자자마다 다르고 상황따라 다르다. 투자에 걸리는 시간을 가늠하려면 먼저 투자 유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일단 CEO가 투자자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즉,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고 있고, 회사 소개 자료등을 만들어 놓음). CEO가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서 투자자에게 직접 연락하거나 혹은 소개를 받아서 미팅을 잡게 되는데 투자자가 그 당시 다른 바쁜 일이 있거나 출장일정등 따라서 약속을 잡는데만 1주일 이상 걸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미팅이 잘 진행되고 나서 투자회사가 내부적으로 의논도 하고 후속 미팅이나 추가 자료등을 요구할 수도 있는데, 이런 작업들 팔로업 하다보면 1달은 쉽게 간다. 텀시트를 받게 된다면 이것을 가지고 네고를 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도 시간이 꽤 소요된다. 또, VC회사들 중에는 ‘투심’ 이라는 약간 공식적인 절차도 거치는 곳이 많은데, 경우에 따라서 이 투심 날짜를 잡는게 몇주씩 걸리기도 한다. 그리고 리드 투자자가 투자를 결정하고 나서도, 공동 투자자를 모집해야 한다면 또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이렇게 투자를 하기로 결정 하고나서, 계약서 (legal document)를 작성하고 수정하는 등의 문서 작업에만 또 1-2주는 쉽게 소진된다. 그렇게 최종문서에 합의하고 무사히 도장찍고 싸인하고 송금하면 클로징이 된다.

그러니까, 정말 아무 돌발변수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도 첫 만남에서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까지는 2개월은 족히 걸린다고 봐야한다. 내가 투자한 건 중 한두번만 만난후 바로 투자 결정하고 프로세스에 들어간 경우가 드물게 있었는데, 그런 경우도 문서작업 등에 걸린시간등 다 합치면 두달은 걸렸던것 같다. (단, equity 투자가 아니라 convertible note 의 경우는 더 빠를 수 있음.) 만약 투자를 할 것 같았던 투자자가 마지막에 발을 빼는 등,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 앞으로 시간이 얼만큼 걸릴지는 아무도 장담 못하게 된다.

첫 만남후 6개월 혹은 1년 이상 지나서야 투자가 이루어 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1년 내내 투자자가 이 투자건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첫 만남후 계속 시간을 두고 그 회사나 그 섹터에 관해 공부를 하면서 지켜보는 경우다. 즉, 단박에 결정을 하는게 아니라 그 회사의 성장이나 팀의 실행력을 시간을 두고 띄엄띄엄 관찰하며 결정하는 것이다.

투자 유치하는데 보통 3~6개월이 걸린다고 가정하면, 이게 뜻하는 것은 아무리 늦어도 돈이 바닥나기 3-4개월 전에는 투자 유치를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투자를 유치하러 다닐때는 투자자들에게 어필할만한 마일스톤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즉, 사용자 수가 얼만큼이라든지, 메이저 계약을 따왔다든지, 프로토타입을 완성했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예를 들어 현재의 예측으로 올 12월에 돈이 바닥이 날 것이고 8월부터 펀드레이징에 들어갈 것이면, 그때까지 뭔가 어필할만한 마일스톤을 달성해놔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하고 당연한 것 같지만 이런게 플래닝이고 경영이다.

이런 타임라인에 근거한 철저한 계획이나 목표 없이 그저 ‘하반기에 어떻게 펀드레이징 해보면 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CEO가 의외로 많다. 스타트업은 항상 시간과의 싸움인 것을 잊으면 안된다. (오늘은 이상하게 잔소리 모드로 글이 끝나네..)

 

* VC마다 프로세스가 다 다르기 때문에 모두 위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아님.

최후의 보루(Plan Z)는 만들어 놓고 창업하자

창업이라는 것은 창업자 개개인의 모든 것 (시간, 열정, 돈 등)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창업이란게 원체 힘든 일이다보니 소위 말해 ‘올인’하지 않고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내가 스타트업을 평가할때도 창업팀이 이 사업에 얼만큼 commitment를 가지고 있는지 중요하게 본다.

그렇다고 창업을 했다가 실패했을때 팀이 모두 길바닥에 나앉아야 한다는건 절대 아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려한다. 누구나 성공을 하려고 창업을 하지만, 만약 성공하지 못했을때는 어떻게 길바닥에 나앉지 않고 살아남을지 개인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창업자이자 VC인 리드 호프만은 이걸 ‘Plan Z’ 라고 했다. 즉, 원래 생각대로 시도하는 창업을 Plan A 라고 하고, 그게 잘 안되었을때 다른 방향으로 피봇하는 걸 Plan B라고 한다면, Plan Z는 이도 저도 안되고 망했을때 살아남기 위한 ‘구명보트 플랜’ 같은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첫 창업때 그의 아버지로부터 ‘창업하다가 망하거나 하면 우리집 빈방에 와서 살아라’ 라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다 큰 성인이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것이 썩 매력적인 일은 아닐테지만, 그는 이걸 Plan Z로 삼았다. 언제든 망하더라도 부모님집에 가서 당분간 공짜로 살 수 있고, 거기서 취직자리는 알아볼 수 있다는 심산이였다.

우리말로 하자면 ‘최후의 보루’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Plan Z는 정신 건강 면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마치 실제 구명보트를 쓰게 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구명보트가 있어야 마음이 편한 것처럼 말이다. 창업자의 관점에서도 Plan Z가 있어야 사업을 할때 좋은 기회가 있으면 적정한 risk taking을 할 수 있다. 이 사업을 하다가 망할 경우 정말 길바닥으로 쫓겨날 신세가 된다면 누구나 아주 보수적인 발걸음만 하게 마련이다.

나는 창업의 케이스는 아니였지만, MBA 하던 시절 Plan Z에 해당하는 오퍼를 받고 큰 위안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나로서는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쳤고, 가지고 있던 집을 팔아서 학비와 4인가족 생활비를 대고 있던 시절이였다. 그래서 MBA 하는동안 좋은 직장을 잡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였다. 인턴쉽 인터뷰에서 줄줄이 낙방하며 좌절하고 있던 시절, 옛 보스가 이메일을 하나 보내왔다. 연말 안부를 물으면서, MBA 성공적으로 잘 하기 바라고, 만약 일이 잘 안풀려 다시 오고 싶으면 바로 hire 해준다는 말이였다. 옛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당시 그가 보낸 메시지는 정말 큰 위안이였다. ‘그래… 하는데 까지 함 해보고 정 안되면 되돌아가는 옵션이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며 좀 더 취업과 MBA 생활에 대해 공격적인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다.

가끔 보면 창업에 너무 올인한 나머지 개인의 모든 재산을 쏟아붓고, 심지어 거주하는 아파트까지 담보로 걸고 사업하는 분들도 본다. 그 열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최소한 홈리스가 되거나 신용불량자가 되는 길은 막아야 한다. 각자 처한 상황은 다 다르겠지만 창업자 모두 Plan Z 하나쯤은 마련해 두고 창업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