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택시

“필구야, 나 이제 버스 못탄다”

허리가 많이 굽으신 어머니가 교회문을 나서며 나지막히 말하셨다. 난 내 귀를 의심하면서 자세를 낮춰 다시 잘 들었다. 이제 버스를 못 타시니 택시를 부르자고 하신다.

‘헐…엄마가 택시를 타자고 하시다니.’

어머니는 평생 택시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오신 분이다. 30분, 1시간 거리도 늘 걸어다니셨고, 그보다 먼길은 반드시 버스나 지하철만 이용하셨다. 지하철이 무료가 된 나이부터는 지하철을 더욱 애용하셨던것 같다.

어렸을때 어머니와 외출이 썩 즐겁지 않았던 이유는 어딜 가더라도 많이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웬만한 거리는 다 걸어야 했다. 어쩌다가 외식 한번 해도 집까지 한참 걸어가야 했다.  버스비도 아까워하시기 때문에 택시는 언감생심이였다. 아주 드물게 택시가 ‘허용’되는 때는 4명정도 일행이 있어서 예상 택시비가 4명의 버스비보다 쌀 때 였다. 반항심인지 몰라도 어렸을땐 이런 어머니의 행보에 불만이 많았다. 괜히 궁상 맞아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후 어머니와 어디갈때면 묵묵히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버스나 지하철을 탔다. 어머니 마음 편하게 가는데 조금이나마 효도이려니 생각해서다. 뭐 나도 버스나 지하철이 크게 불편한건 아니다. 단, 파킨슨 병으로 조금씩 몸 상태가 안좋아 지시는 어머님을 편하게 모시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말이다.

요새 내가 한국에서 출장중에는 외부 일정들이 많아 하루에도 여러번 택시를 탄다. 지하철이 빠를땐 지하철을 타지만, 지하철 연결이 애매한 목적지까지는 시간이 아까워 그냥 택시를 탄다. 하지만 아직도 택시타고 1만원 이상 거리를 갈때면 ‘내가 좀 사치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일종의 죄책감이 스친다. 아마 어렸을때부터 택시는 사치라는 걸 세뇌(?) 당해서 그랬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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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교회에서 나와 여느때처럼 당연히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려 했는데, 한달만에 뵌 어머니가 택시를 타자고 하신다. 더이상 버스를 올라탈 기력이 안되신다고. 급하게 택시를 불러 거동이 많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뒷자리에 앉혀드리고, 나는 운전사 옆 앞자리에 앉아서 갔다. 집으로 가는 15분동안 나는 앞에서 눈물만 줄줄 흘렸다. 내가 우는걸 아실까봐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런날은 꼭 택시 기사 아저씨가 라디오도 안틀더라. 그나마 어머니가 날 볼 수 없는 앞자리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면서 어머니는 다소 심기가 불편하신 표정으로 뭐라고 중얼거리신다. 아침에 똑같은 거리를 타고 가셨을때는 요금이 4천원이였는데, 지금은 4천8백원이 나왔다고.

이따가 난 강남까지 2만원 정도 거리를 타고 갈 예정인데 벌써부터 죄책감이 밀려온다.

 

 

First Seven Jobs

요새 미국 소셜미디어에서 자신의 첫 7개 직업이 무엇이였는지 밝히는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해쉬태그 #firstsevenjobs).  내 첫 직업들은 뭐였었나 생각해 봤는데, 별로 재미있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못해 본 것 같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돈 아니라 경험을 위해서라도 좀 더 다양한 일을 해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내 첫 7개 직업은 아래와 같다.

  • 과외교사 – 대학 1학년때부터 용돈 벌 요량으로 주로 고등학생들 영어, 수학등 방문지도. 한 학생당 일주일에 두번가고 매번 2시간 정도는 했던것 같음. 어떤 학생은 잠실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에 살아서 학교에서 가려면 1시간도 넘게 걸렸는데, 그래도 부모님에게 손벌리기 싫어서 마다 않고 열심히 벌었음.  한 학생당 40만원 정도 받았던 것 같은데 당시로선 짭잘한 수입.
  • 도서관 수위 – 대학시절 미국 University of Maryland에 교환학생 비스무리한 것으로 1년 다닌 적이 있는데, 파키스탄 룸메이트가 추천해준 꿀 알바. 공식 명칭은 ‘Student Police Aide’로 학생 신분이지만, 동네 경찰과 교신할 수 있는 무전기를 공급받고 교내를 순찰하는 직업. 영어 못해도 문제 없었음. 내가 주로 근무한 곳은 학교 도서관 출입구에서 책 훔쳐나가는 사람 없나 감시하는 일. 실제 그런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서 책 읽거나 숙제하면서 자리만 채워도 시간당 약 6불 받았던 기억. 가끔 저녁에 캠퍼스 순시하고 있으면 학생들이 내가 경찰인줄 알고 이런저런 신고나 부탁을 해서 웃겼음 ^^ (이 학교 주변 물정은 미국온지 3달된 나보다 니가 더 잘 안다구 ㅋㅋ)
  • 통역 – 한국에 돌아와서 복학후, 출장나온 미국인들 통역 알바를 함. 주로 해당 미국인의 호텔에서 한국 회사들에 대신 전화 걸어주는게 임무였고, 종종 비지니스 미팅에 따라가서 서툰 영어로 통역. Broken English였지만 뜻만 통하면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고, 오히려 내가 한국에서도 영어를 계속 연습할 수 있어서 좋았음. 친구들에게도 소개시켜 줘서 재미있게들 알바 뜀. 어린나이였지만 이런 중개사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는데.
  • 대기업 인턴 – 대학 4학년 학사 일정을 겨울에 마치고 유학을 떠나기전 공백기간이 약 7개월은 족히 되므로 뭔가 해야할 것 같아서 대기업 인턴을 신청. 모기업 전자회사 였는데, 나름 전자공학도 출신이라 의미있는 일을 할 줄 알았지만, 막상 5개월동안 한 일은 오전내내 타이핑 (책을 워드로 옮기는 일) 내지 복사같은 잡일. 물론 오후엔 시뮬레이션같은 것도 돌렸지만 일이 너무 단조롭다고 느낌. 기업문화도 숨막힐 것 같았음. 얻은 것이라곤 ‘나는 대기업과 잘 안맞는구나’ 하는 사실을 일찍 깨달은 것.
  • 연구 조교 (Research Assistant) – CMU로 유학온게 98년 이였는데 당시 IMF 여파로 살인적인 환율에도 유학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학교에서 Research Assistant 자리를 주며 학비와 생활비를 보조해 줬기 때문. 직업이라고 하기는 좀 힘든게, 그냥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석사 대학원생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연구를 하는 것. 행정 잡일은 전혀 없었음.  매달 세금 제하고 $1100(약 120만원)정도의 월급을 받았는데, 당시에 와이프와 같이 살던 원베드 아파트 렌트비가 $605불 이였고, 나머지 $500불로 둘이서 어떻게든 한달을 살아보려 발버둥 쳤다 ㅎㅎ
  •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 CMU에서 석사를 졸업하고 얻은 첫 직업. Neolinear라는 피츠버그 소재 스타트업으로, 반도체 디자인 CAD 툴을 만들었다. 당시 개발자로서 나의 코딩 실력은 내가 봐도 참 형편없었는데, 단지 컴싸 전공자들 보다는 반도체를 좀 안다는 구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행히 골치아픈 C++는 많이 안써도 되었고, TCL이나 LISP류의 스크립트 언어로 근근히 먹고 살 수 있었음
  • 애플리케이션 엔지니어 –  위 회사에서 CMU 출신의 동료 개발자 들의 솜씨를 보자니 거의 넘사벽 수준이였음. 일예로 바로 내 옆자리 친구는 Caltech학부와 CMU대학원을 나왔는데, 코딩 짜는 속도가 내 타이핑 속도보다 빨랐음 (절대 과장 아님). 당장 짤리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내 실력으론 경쟁력이 없다는 걸 깨닫고, 코딩 많이 안해도 되는 애플리케이션 엔지니어가 되기로 자원. 주로 커스터머 만나서 지원해주고 문제도 해결해 주고 교육도 하는 일. 기술적인 일이지만 회사 밖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개발 이외의 세상에 눈을 뜨게한 좋은 경험.

 

전문가를 키우지 않는 사회

얼마전 페이스북에서 유럽계은행에 다니는 딸과 한국계 은행에 다니는 아들을 비교한 최동석님의 글을 접했다. 이 글에서 내 눈에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유럽계 은행에서는 직원들이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반면, 한국계 은행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였다. 그 글에 따르면 딸이 재직중인 유럽계 은행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타 부서로 인사이동이 없기 때문에 같은 분야에 장기 근속할 수 있고 어느새 ‘압도적인 전문가’가 된다고 한다. 반면 아들이 다니고 있는 한국계 은행에서는 2-3년마다 일어나는 보직순환제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제대로된 업무 습득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게 비단 은행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계열사를 여럿 거느린 한국의 재벌기업도 비슷한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가끔 신문에도 나는 재벌 기업들의 사장단 인사나 그에 따른 임원들 이동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반도체쪽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이 갑자기 소프트웨어 회사 사장으로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IT쪽에 계셨던분이 IT와는 상관없는 물류나 건설회사 같은데로 이동하기도 한다. 탑레벨이 그렇게 움직일 때 ‘자기 사람’을 데리고 다니다 보니 그밑의 실무진도 동일한 운명이다. 당사자의 역량이나 희망보다는, 그때 그때 그룹의 사정에 따라 옮겨다니며 ‘배치’ 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회사 자체를 옮기는 보직순환도 허다하니, 회사 내에서 부서 옮겨다니는 건 이야기거리도 안될거다. 주위에 종종 미국 파견근무나 장기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분들을 보는데, 그 중 상당수는 자신이 어느 부서에 ‘발령’ 날지 모르는 채로 귀국한다. 이렇게 여러 부서를 돌다보면 여러가지를 겉핥기 식으로 배울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 분야에 식견과 비전을 가진 전문가는 결코 될 수 없다. 그리고 본인의 전문성 결여에서 오는 왠지 모를 불안감은 성과보다 인간관계 다지기에 더욱 목을 매게 만든다.

언론사는 또 어떠한가?  아는 기자님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기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한 기자가 한 분야에서만 10년이상 파고 들어야 깊이 있는 취재나 기사가 나올 법한데, 국내 언론사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원천봉쇄 되고 있다.  대부분 기자들이 2-3년을 주기로 부서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부에서 3년 있다가 막 국제부로 넘어온 기자에게 시리아 내전의 깊은 의미를 우려낸 기사를 기대할 수는 없다.  뉴욕타임즈나 테크크런치 같은 매체를 보면 기자의 깊은 지식과 통찰력에 감탄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사람들은 이미 그 분야를 아주 오랫동안 파헤친 사람들로서 전문가로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다. 당연히 해당 업계의 인맥도 좋아서 고급 정보 제보도 받고, 남들이 하기 어려운 취재나 인터뷰도 가능할 것이다. 내 생각에 한국 기자가 머리가 딸려서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수준 낮은 기사가 생성되는게 아니다.  그럴 환경이 아예 주어지지 않는것 같다.

공무원 조직은 또 어떠한가? 공무원들의 보직 변경은 밖에서 보기에도 정신이 없다. 도대체 같은 자리에 2-3년 이상 있는 사람을 본 일이 드물다. 정치적인 자리인 장/차관 자리야 그렇다고 쳐도, 실무자/담당자 들도 계속 자리가 바뀌기 때문에, 바깥 입장에서 보기엔 계속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 부담과 비효율이 생긴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해야 ‘공무원 비리’를 차단할 수 있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같은 사람과 계속 일할때 서로 알고 있는 일의 맥락이나 전문성은 큰 효율을 가져온다. 원래 하던 사람이면 간단히 전화 한통이면 끝났을 일을, 새 담당자가 오면 일단 만나서 얼굴 보여주고, 히스토리 다시 설명해주고, 이걸 왜 해야하는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다시 설명과 설득을 반복해야 했던 경험을 많이들 해봤을거다. 공무원들의 돌고도는 인사이동은 내부 역량의 전문성 결여라는 문제와 민간 사업자의 비효율을 동시에 초래한다.

이렇듯 끊임없는 자리이동을 거치고나면 조직내 가득한건 generalist (다방면을 많이 아는 사람, 일반 관료)요, specialist (전문가)는 가뭄에 콩 나듯 하게 된다. 우리나라 경제가 고속 성장을 하던 시절에는 전문성이 다소 떨어지는 제품이나 서비스도 내수 시장에서 그럭저럭 팔렸으니 먹고 살만 했다. 하지만 국가간 장벽이 점점 낮아지는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전문가 부족 현상은 결국 우리나라의 국제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까 우려스럽다. 위에서 인용한 최동석님 글의 예만 봐도 쉽게 감이 온다. 도대체 우리나라 금융기관중에 국제 경쟁력을 가진데가 과연 있을까? 금융시장이 개방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지금이라도 정부와 기업들은 전문가를 많이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을 좀 적극 도입했으면 좋겠다. 고도의 지식사회에서 우리를 먹여 살릴 사람들은 그들이다.

 

++ +

사족: 이런 글을 쓸때면 누워서 침뱉기 같아서 사실 마음이 불편하다. 전쟁을 극복하고 기적같은 경제성장을 이룬 우리나라지만, 당연히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 기준으로 바라보면 아직 부족하고 비합리적인 것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과 답답한 마음에 이런 글을 토해내게 된다.

 

 

 

 

알파고의 승리와 인간의 능력

사실 충격이였다. 나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번 대회에는 이세돌의 압승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니, 내심 그러길 바랬다. 바둑도 모르고 인공지능도 잘 모르지만, 왠지 아직까지는 인간대표가 기계대표를 확실히 꺾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난생 처음 관람한 대국이였다. 바둑에 관심이 없으니 평소에 대국을 시청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이건 보고 싶었다. 평소 축구 안보는 사람도 월드컵은 보듯이 말이다. 여러 해설을 듣고 싶어서 영어 중계방송과 한국어 방송을 번갈아가면서 지켜봤다. 한국어 방송에서는 대국 중반쯤 알파고가 어이없는 실점을 두는 바람에 이세돌이 확실히 승기를 잡았다고 반복했다. 그런데 영어 방송 해설자들은 그런말이 없었다. 그들은 전세는 막상막하이고 가슴이 떨려올 정도의 접전이라고 말했다. 바둑을 볼 줄 모르니 누구 말이 맞는지 알길이 묘연했다.

그런데 대국 후반으로 가니 이제 해설자들이 집을 세기 시작한다. 대충 윤곽이 보이나 보다. 한국어방송의 해설을 맡은 유창혁 기사는 이때쯤부터 말수가 줄어들며 상당히 당혹스런 눈치다. 난 이때 확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아… 무슨 일이 났구나’

영어방송 해설자들이 그래도 아직 스코어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상태라고 하니, 대국이 꽤 이어질 줄 알았다. 미국 서부시간으로는 자정 근처 시간이라 끝까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그런데 이세돌 기사가 갑자기 돌을 내려놓으며 기권했다. 영어방송 해설자들도 사뭇 놀라는 눈치다. 아마 좀 더 해볼만 하지 않나라고 생각을 했을텐데, 프로기사 이세돌의 생각에는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난생처음 관람한 대국은 기계의 승리로 끝났다.

중계방송은 끝났지만, 뭔가 다른 세상 chapter 1에 온것 같아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인간 대표의 완패’라는 충격과 이제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기계보다 잘 할 수 있는게 뭐가 남았다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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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도 없고 마차도 흔치 않았던 시절에는 장거리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꽤 추앙을 받았을것 같다. 사냥을 할때도 유리했을 테고, 멀리 소식을 빨리 보내는데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반면에 현대의 마라톤 선수는 고대 사람들 보다 훨씬 빨리 뛰겠지만, 마라톤 선수가 기록을 단축한다고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자동차라는 기계의 힘을 빌리면 인간의 다리보다 몇십배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의 달리기 실력은 우리 보통 일상생활에는 irrelevant 해진지 오래다.

인간의 ‘계산 능력’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옛날에는 복잡한 계산을 척척 해내는 사람이 회사마다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은행같은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일반 회사들도 온갖 회계장부 정리하려면 누군가 이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처리해내야 했을테니, 이런데 재주가 있는 사람은 돈을 잘 벌었을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도 초등학교 저학년때 주판학원을 다녔다. 그때만해도 은행에가면 창구 직원이 주판도 가지고 있었던것 같다. 컴퓨터가 나오면서 이런건 이제 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가 되었다. 이미 인간의 계산 능력은 구멍가게에서 쓰는 3천원짜리 계산기보다 못하다.

기계보다 달리기도 느리고 계산도 한참 느리지만, 인간으로서 그동안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건 고난이도 문제가 있을때 이를 경험에서 오는 직관이나 상상력등을 총동원해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아니였을까. 인공지능에서 바둑이 난제였던 이유는 경우의 수가 극히 많아서라고 들었다. 그러니 각각의 수보다 전체 판세를 읽어 ‘직관(intuition)’을 이용해 전략적 포석을 둘 줄 아는 인간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이 바둑이라고 믿어왔던 거다.

직관이라는 것을 잘 살펴보면 결국 오랜기간의 경험(=데이터)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패턴인식을 하고 그에 따른 판단인 셈이다.  나도 내 직업(벤처캐피탈)에서 직관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투자를 결정할때 회사의 매출같이 수치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창업자의 인생 스토리라든지, 업을 대하는 태도라든지, 공동창업자간의 끈끈함 같은 부분은 정량화 하기 힘들어서 결국은 내 경험 (창업자를 많이 만나면서 학습한 것)과 패턴인식에 기대게 된다. 아마 많은 환자를 대하는 의사들도 나름의 직관적인 감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직관은 당연히 정확할 수 없고 틀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기계가 따라오기 힘든 인간 고유의 인지능력이라고 대부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직관이라는 것도 알고리즘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게 이번 알파고-이세돌 대국에서 증면된 셈이다. 아직 5전중 1승이지만, ‘직관적 판단력’이 크게 작용하는 게임에서 기계 대표가 인간 대표를 기권승으로 이긴것은 정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머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직관력도 계산능력이나 달리기실력 같은 신세가 되는게 아닌지 모르겠다. 섬세한 판단을 요구하는 일 (환자의 치료방법을 결정하거나, 투자대상 회사를 고르거나 등)은 결국 모두 기계가 담당하고, 인간의 직관력은 risk가 낮은 보드게임 같은데서 ‘스포츠’ 용도에나 쓰이게 되는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인간이 머리써서 하는 것중에 기계보다 잘 하는게 뭐가 남을까? 창의력? 상상력? 이미 기계가 소설도 쓰기 시작했고 작곡도 한다는데? 우리 아이들 세대에는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까?

답은 잘 안떠오르고 질문만 잔뜩 생기는 그런 날이다. 오늘은 이세돌이 이겨줘야 잠을 좀 더 편히 잘 것 같다.

IKEA 예찬론

98년 결혼과 동시에 유학와서 마련한 첫 신혼집은 피츠버그 시내 학교 근처의 작은 아파트였다. 방 1개 짜리에 월세는 $605불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싸게 보이는데, 그때는 내가 대학원생으로서 학교에서 받는 월급이 세금 제하고 약 $1100불 정도여서, 월세가 꽤 부담가는 액수였다. 암튼 그렇게 쪼들리며 살아가던 시절, 우리집 가구는 죄다 IKEA제품이였다. 침대, 책장, 서랍장, 소파 등등 굵직한 가구는 물론, 집안의 소품이나 살림살이들도 IKEA 것들이 참 많았다. 물론 그 이유는 저렴한 가격 때문이였다. 우리가 직접 가서 사온것도 많았고, 다른 유학생에게서 물려 받거나 어디가서 중고품을 사와도 결국은 IKEA 제품이였다. 갓 한국에서 온터라 전동공구도 없이 드라이버 하나 들고 아내와 밤마다 참 열심히 조립했던 기억이 난다. 가구 조립작업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그렇게 녹록한게 아니다. 한시간 넘게 하다보면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가 된다. 땀에 젖어 헐떡이며 우리 부부는 습관처럼 이런 말을 하며 훗날을 기약했다.

“우리 나중에 돈 벌면 IKEA 가구는 졸업하자”

미국에 살면서 IKEA 가구 조립을 하도 많이 해서, 나중에는 웬만한 제품은 설명서를 보지 않고 조립을 할 수 있을것 같은 느낌이 솟구칠 정도가 되었다. IKEA 가구들은 주로 톱밥을 압축한 나무를 쓰는데, 거기서 나는 독특한 냄새와도 참 친해지게 되었다.

아마 90년대만 해도 IKEA 가구가 (인기는 좋았지만) 내구성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 학생때 잠시 몇년 쓰다가 버리거나 팔아버리는 ‘임시 가구’ 정도의 브랜드 이미지가 강했다 (지금도 어느정도 그렇다). 조립 가구이다 보니 몇년 쓰다보면 어딘가 헐거워지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서였을거다. 그래도 사람들이 별 불만이 없는 것이, 가격이 워낙 싸서 2-3년만 써도 ‘본전 뽑았다’라고 생각 하는 것 같다.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몇년 뒤 내집마련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쯤 부턴 그간의 다짐 때문이였는지 한동안 IKEA 가구를 별로 사지 않았다. 왠지 IKEA를 사지 않아야 학생 때를 벗고 진정한 사회인으로 거듭날 것 같은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소 늦은 나이에 또 공부를 한다고 이사를 간 적이 있는데, 집 크기를 대폭 줄여야 했다. 방 4개 짜리 2층집에서, 2베드 아파트로 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작은집에 맞는 새로운 가구가 필요했는데, 역시 학생 버짓에선 IKEA만한게 없었다. 그때 아이들 침대를 사주며 아빠가 공부하는 기간인 2년동안만 쓰라고 했다. 헌데 결과적으로 아직도 쓰고 있으니 8년 넘게 쓰고 있는 셈이다. 아직도 너무 튼튼해서 바꿔줄 이유가 별로 없다.

내가 보기에 IKEA의 큰 특징은 해가 다르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마치 테크 회사처럼 말이다. 다른 가구 회사들 보면 10년 지나도 디자인이나 제품들이 그냥 비슷비슷하다. 달라진게 별로 없다. IKEA는 내가 지켜본 15년 정도동안 소소하지만 날 즐겁게 해 준 발전이 많았다. 포장 기술도 발전했고, 조립도 예전보다 확실히 쉬워졌다 (부품을 스텝별로 분류해 놓음). 내구성도 많이 좋아져서, 우리집에 10년넘은 IKEA가구가 꽤 된다. 또, 이제는 톱밥나무만 쓰는게 아니라 solid wood(원목)를 쓰는 제품도 늘었다. 디자인도 확실히 좋아졌는데, 예전에는 딱 보면 IKEA티가 나는 제품이 대부분이였지만, 이제는 그냥 일반 가구점에서 사왔다고 해도 믿을만한 제품이 많아졌다. 그러면서도 가격은 15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업계 최저가를 자랑한다. 정말 정말 싸다.

얼마나 싼가? 최근에 실생활에서 시장조사를 할 기회가 생겼다. 10년 넘게 써온 침대 프레임(나무)에 쩍하니 금이 가서, 교체하기로 했다. 매트리스는 그대로 쓰면 되니 침대 프레임만 바꾸면 된다. 내가 원하는건 그냥 평범하고 무난한 디자인의 나무 프레임이다. 동네의 가구점 몇군데 (Thomasville, Ethan Allen) 를 방문해서 알아봤더니 대략 퀸싸이즈 프레임이 $2000불 내외였다. 물론 아웃렛같은 곳을 가면 더 싼곳도 있겠지만 멀리 가기는 귀찮았다. 아내의 권유에 IKEA도 가보게 되었다. 사실 처음엔 IKEA에서 살 생각이 별로 없었다. 오래 쓸거니 그냥 비싸더라도 일반 가구를 사는게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였다. 그런데 가서 보니 안 살 수가 없었다. Solid wood 재료를 쓰고 내가 보기에 디자인도 괜찮은 제품이 단돈 $450불! 내가 운반하고 조립해야 하긴 하지만, 다른 가구점의 1/4 가격이다 . 더이상 망설임이 필요한가? 그자리에서 당장 사버렸다. 이건 2-3년만 써도 본전이야. 물론 가격만 싸다고 산건 아니다. 디자인도 이만하면 훌륭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IKEA 간김에 신발장같은 다른 가구며, LED 전구, 램프, 침대 시트등 온갖 집기까지 덤으로 잔뜩 샀다. 그래도 쓴 돈은 $1000불. 아직 다른 가구점에서 침대 프레임을 샀으면 썼을 돈의 반밖에 못 썼다.

IKEA에서 파는 침대 프레임의 예. 이렇게 서랍까지 달린 침대가 $300불 미만이다.
IKEA에서 파는 침대 프레임의 예. 이렇게 서랍까지 달린 침대가 $300불 미만이다. (클릭하면 IKEA 침대 프레임 가격대 확인 가능)

주말에 아내와 한바탕 IKEA 가구들을 열심히 조립했다. 이젠 우리는 숙련공에 가깝고, 전동 공구도 있어서 참 편해졌다. 한쪽에는 아이패드로 영화를 틀어놓고 나름 즐기면서 나사를 조인다. 이젠 조립하면서 옛날처럼 ‘우리 나중에 돈벌면 IKEA 졸업하자’ 이런 말 안한다. 대신

“음, 가격대비 만족도는 역시 IKEA가 짱이지”

라고 중얼거리며, 조립이 끝난 우리의 작품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