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금단 현상

오늘은 가벼운 이야기 하나.

지난 열흘간 가족과 휴가를 다녀왔다. 크루즈 여행이였는데,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출발해 알라스카 몇군데와 캐나다를 거쳐오는 일정이였다. 늘 그렇듯이 휴가를 떠날라치면 바쁜일들이 몰려오게 마련인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였다. 중요한 미팅으로 상사와 한국에 출장 갈 일이 생겼는데 휴가 일정과 겹쳐서, ‘난 출장 못간다’는 겁없는 선언을 하고 회장님만 한국에 보내는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

휴가 전날까지 정신없이 일하다가 막상 휴가를 떠나려고 하니 걱정이 있었다. 열흘씩 자리를 비우는 것이니 일의 공백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내가 과연 열흘동안 인터넷 없이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였다. 일단 목적지로 도착하는데 사흘이 걸리니 그동안은 망망대해에서 통신이 단절된 상태일테고, 도착해서도 알라스카의 듣보잡 항구도시에 무선 인터넷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 후로도 계속 배로 이동하는 중에는 인터넷을 사용 못할게 뻔했다. 떠나기 전날 생각해보니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한이래 인터넷 없이 이렇게 오랜기간을 지내본 적이 없었다. 늘 이런 저런 출장으로 여행을 하게 되지만 비행기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인터넷은 늘 내 주머니속에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열흘이라는 시간이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일단 ‘까짓거 별일이야 있겠어’라고 생각하며 내 자신을 테스트해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이 없는만큼 가족과 대화할 시간도 많을테니 휴가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기회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마음 한구석은 은근 불안했지만 말이다.

막상 배에 오르고 이틀정도는 별다른 금단 증상 없이 잘 지나갔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습관때문인지 Airplane 모드로 세팅된 아이폰을 보며 이메일과 테크니들, 트위터, 뉴스등이 궁금하긴 했지만 무리없이 휴가에 집중할 수 있었다. 휴가를 떠나기 전에 벌여놓은 일들이 많아서 이런 저런 생각과 잡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지만, 한 이틀동안 이메일을 완전히 끊고나니 둘째날 저녁쯤엔 은근 마음의 평화같은 것도 잠시나마 느꼈다. 이래서 사람들이 unplug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사흘이지나 도착한 첫번째 목적지는 케치칸이라는 작은 마을이였는데 예상과 달리 무선인터넷이 되었다. 그것도 4G! (LTE는 아님). 오오.. AT&T의 커버리지에 은근 감탄하며 신나게 이메일을 다운로드 받고, 뉴스들도 확인하고 막간을 이용해 테크니들 기사도 올리고 그랬다. 도착지에서는 관광 일정이 있으므로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보낼순 없었지만, 틈틈히 아이폰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며 마치 일상의 주말처럼 느껴졌다. 내가 없어도 실리콘 밸리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

금단현상은 그 후에 나타났다. 인터넷이 안되는 배에 다시 오르고 다음 목적지로 가는 동안 좀 답답했다. 다음 목적지에서도 인터넷이 잘 될 것 같은 기대감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혹시 벌써 도착했을까, 인터넷이 되는가 확인해보고 안되면 다시 자고 그러길 반복했다. 알라스카의 주도인 주노(Juneau)에 도착했을때는 LTE까지 빵빵하게 터졌다. 이런 오지(?)에서도 초고속 무선 인터넷이 터져주니 속이 다 후련했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업무 이메일, 개인 이메일등이 쏟아지는데 그중에는 달갑지 않은 소식들도 있었고 내 뜻과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일도 있었다. 스트레스가 확 몰려옴을 피부로 느꼈다. 휴가중에는 웬만하면 이메일 답장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어서 그냥 대부분 모른척 하기로 했는데, 그게 더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표정이 굳어지는 나를 아내는 안쓰럽게 쳐다보고 난 괜찮다고 그러고…흑. 그래도 이곳 저곳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두고온 일들에 대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으니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예 휴가중에는 인터넷을 완전히 끊어버릴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게 또 궁금해 하며 한참을 배에서 지내다가 다음 도착지에서 만난 2G (Edge network) 통신망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2013년 기준으론 용서가 안되는 느림보 인터넷이지만, 이게 어딘가. 스마트폰의 “Loading…”이란 글자와 뱅글뱅글 돌아가는 아이콘을 이렇게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본 적도 없었을거다. 옛날에 자취방 방구석에서 뚜뚜- 소리를 내던 전화선 모뎀으로 PC통신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헐, 벌써 20년전이구나. 결국 급한 사항들은 이메일 답장도 하게 되었고, 심지어 내가 관리하고 있는 테크니들 싸이트의 호스팅업체가 갑자기 서버이전을 해서 웹페이지가 완전히 먹통이 되었는데, 이 문제도 인터넷 접속해서 배가 떠나기 전에 미친듯이(!) 해결해야 했다. 마지막 작업을 하는 중에 배가 움직이기 시작해서 정말 아슬아슬했다 ^^.

마지막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는 날엔 문명의 세계로 돌아온다는 설렘에 새벽 3시부터 잠을 설쳤다. 아직 항구에 도착하지 않은걸 확인하고 다시 잠을 청하기를 반복하다가 5시쯤되니 시그널이 희미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그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이폰을 들고 시그널이 좀 더 강할 것 같은 배의 꼭대기층에 올라갔다. 이정도면 집안의 어딘가에 남아있을 술병을 찾아 헤매는 알콜중독자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꼭대기층 바깥에서 인터넷을 확인하려고 하니 AT&T에서 내 계정 data 서비스를 중단했다는 문자가 왔다. 허걱. 해외에서 갑자기 로밍 데이터를 많이써서 일단 보안상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거였다. 이런 젠장! AT&T가 갑자기 미워졌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날이 밝을때까지 기다려야해서 심퉁거리고 있는 찰라에, 저멀리 동이 트고 있었고 금문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 멋진 광경! 재빨리 아이폰으로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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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광경을 좀 더 잘 보려고 배 앞쪽으로 가보니 5:30의 이른 새벽이지만 카메라를 들고 구경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마 이 시간에 인터넷하러 밖에 나온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몇시간이 지나 배에서 내려 data 서비스 문제를 해결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한손에 아이폰을 들고 각종 이메일과 뉴스등을 LTE로 쭉쭉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광경을 보던 아내가 날더러 데이터를 피속에 주입하고 있는 느낌이냐고 물었다 ^^. 집에 돌아와서는 몇시간동안 온가족이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아이들을 포함, 식구 모두 각자의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들고 밀린(?) 인터넷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난 이미 인터넷 중독자임을 깨달았다. 다음 휴가는 웬만하면 인터넷이 되는 곳으로 갈 것 같다. 아무리 휴가중이라도 하루에 한 두번이라도 확인해 주는게 일주일씩 안보는 것 보단 차라리 맘이 편할 것 같기 때문이다.

15 thoughts on “인터넷 금단 현상

  1. 힘든, 그리고 색다른 경험을 하셨네요. 저도 휴가 갈 일이 있으면 인터넷 연결을 미리 확인해야겠네요.

  2.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일 것 같습니다. 흥미진진하게 잘 읽었습니다. ^^

  3. ㅋㅋㅋㅋ 뱃머리에서 타이타닉의 디카프리오처럼 아이폰 쳐들고 계셨던 건 아니신지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뚜뚜~ 모뎀하던 시절이 벌써가 아니라 불과 20년 전이라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1200bps 모뎀으로 케텔 접속하면 모니터에 글자가 한 글자씩 타이프 치듯이 찍혔었는데… 글자 하나 하나가 정말 소중했던 시절입니다 -_-;

  4. 의외의 결말이군요. “이번 여행을 통해 난 이미 인터넷 중독자임을 깨달았다. 다음 휴가는 웬만하면 인터넷이 되는 곳으로 갈 것 같다. ” 이런 고백후에는 끊는 이야기를 하는 내용들이 많았거든요. ‘적당히 하기.’ 가장 어려운 기술인것 같아요.

  5. 곳곳에 있는 표현들이 너무 재밌어요. 생동감 있고요. ‘집안에 남은 술병’ㅋㅋㅋ 크루즈이지만, 배멀미 살짝 느꼈답니다. ㅎ 주욱 읽다보니, 금문교 캐치하시곤 ‘쭉쭉 빨아들이는’ 장면에서 비장미 흐르는 BGM이 들리는 듯 합니다. 사모님 대사도 재밌구요~ :)

  6. 하하하 너무 재미있으면서도 공감가는 내용이네요..
    “데이터를 피속에 주입하고 있는 느낌이냐고 물었다 ^^”에서는 마침내 뿜었습니다…ㅋㅋㅋ
    요세미티 캠핑가서 signal을 찾아 산기슭을 헤메던 제모습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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