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상담 1 – 학부전공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가끔 자신의 진로나 전공에 관해 상담 요청을 받는다. VC쪽에 있다보니 주로 경영, 창업 혹은 기술분야에 종사하시거나 관심이 많은 분들로부터 문의를 주로 받는다. 지금 내 커리어도 코가 석자인데 남을 상담해 주는 것이 어찌 보면 우스울수도 있는데,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가급적 도우려 노력하는 편이다. 워낙 질문들이 다양해서 블로그에서 한꺼번에 다 다루기는 그렇고 오늘은 대학 학부 전공에 관한 이야기로 연재를 시작해 보려 한다. (이 연재는 오늘 끝날지도 모른다 ^^)

우선 난 학부 전공은 최대한 본인 자율에 맡기는게 좋다고 본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진로나 취직문제 떠나서 그냥 한번 푹 빠져서 공부해 보고 싶은게 있으면 그게 중세 사학이든 원자핵 물리든 대학때 해보는게 좋다. 나이가 들면 점점 그런 기회가 없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진로 상담을 해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뭘 공부하고 싶은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거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대충 취직 잘 된다는 전공 중 몇개를 놓고 고민하다가, 주위의 조언을 들어가며 ‘무난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우리나라 교육의 큰 문제이기도 하다. 입시위주의 교육만 받다보니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해도 자신이 뭘 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도 좀 그랬다. 주어진 과제는 잘 풀어갔지만, 막상 과목을 선택 하라면 당황스러웠다.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은근 더 불안하고, 결정에 자신도 없고, 조언도 더 많이 구하게 되는 것 같다. 선택의 기로에 있을때 조언도 조언이지만, 실은 그런때 일수록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 어느 누구라도 날더러 ‘넌 화학을 좋아해야되’라고 강요할 순 없잖은가. 딱히 완전히 맘에 드는 전공이 없더라도 그나마 좀 흥미를 느꼈던 것 몇개라도 추리고, 조언을 받으러 갈 땐 자신이 생각해 놓은 몇가지 옵션을 말해주고 시작하는 게 좋다. 예를 들어 건축학과 물리학 두개중 택일하고 싶다면 각 전공을 왜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전공을 통해서 얻고 싶은게 뭔지등의 배경 설명을 해주면 상담해 주는 사람이 훨씬 좋은 말을 해줄 수 있다. 특히 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면.

나는 내가 공부해 본 공학과 경영학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둘중에 학부 전공으로 뭐가 좋겠냐고 물어본다면 난 주저 없이 공학을 택하라고 한다. 공학이 나름 재미도 있고 전망 있는 분야이기도 하지만, 난 보통의 경우 학부생 전공으로 경영을 추천하지 않는다. MBA를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게 좀 이상할 수 도 있지만, 경영을 학부전공으로 추천하지 않는 이유를 정리해보면

1) 딱히 교실에서 안배워도 비지니스는 직관적인 내용이 많다 –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CEO나 비지니스 리더들이 경영학을 전공하지 않고도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물론 accounting이나 finance와 같이 테크니컬한 분야는 좀 다르지만, 마케팅, 전략, 인사, 생산 관리등은 직관적인 내용들이 많아서 실전에서 부딪히면서 익혀도 회사생활에 큰 문제 없는 경우가 많다.

2) 나중에 배울 기회가 많다 – 회사를 나와서 MBA를 갈 수도 있고, 회사를 다니면서 주말 MBA 프로그램 같은 것을 할 수도 있고, 그냥 경영서적을 찾아서 읽으며 탐독할 수도 있고 등등 경영은 나중에라도 이런 저런 경로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공학의 푸리에 트랜스폼이나 컴퓨터의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체계적으로 터득하기는 훨씬 어렵다.

3) 경영은 ‘학문’의 성격보다 ‘job skill’에 가깝다 – 경영학 교수님들은 아마 이런 주장에 반대하실 것 같다. 물론 경영도 깊이 들어가면 학문적 성향이 강하겠지만, 비지니스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늘상 경험하고 있는 ‘경영’이라는 분야는 직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skill set과 관련이 깊다.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법대와 의대는 ‘professional school (직업학교)’이라는 명명하에 학부를 졸업한 사람들이 지원하는 대학원 체제로 운영되어 온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비지니스 전공은 학교마다 달라서 대학원 과정인 MBA에서만 제공하기도 하고, 학부에서부터 제공하기도 한다 )

암튼 생각보다 말이 길어졌는데, 요는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스펙, 취직 그런거 생각말고 그거 공부하면 된다. 그런게 뚜렷이 없더라도 본인의 흥미와 적성을 잘 관찰해서 결정하되 학부에서는 ‘job skill’ 보다는 ‘어려운 학문’을 추천.

인터넷 금단 현상

오늘은 가벼운 이야기 하나.

지난 열흘간 가족과 휴가를 다녀왔다. 크루즈 여행이였는데,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출발해 알라스카 몇군데와 캐나다를 거쳐오는 일정이였다. 늘 그렇듯이 휴가를 떠날라치면 바쁜일들이 몰려오게 마련인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였다. 중요한 미팅으로 상사와 한국에 출장 갈 일이 생겼는데 휴가 일정과 겹쳐서, ‘난 출장 못간다’는 겁없는 선언을 하고 회장님만 한국에 보내는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

휴가 전날까지 정신없이 일하다가 막상 휴가를 떠나려고 하니 걱정이 있었다. 열흘씩 자리를 비우는 것이니 일의 공백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내가 과연 열흘동안 인터넷 없이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였다. 일단 목적지로 도착하는데 사흘이 걸리니 그동안은 망망대해에서 통신이 단절된 상태일테고, 도착해서도 알라스카의 듣보잡 항구도시에 무선 인터넷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 후로도 계속 배로 이동하는 중에는 인터넷을 사용 못할게 뻔했다. 떠나기 전날 생각해보니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한이래 인터넷 없이 이렇게 오랜기간을 지내본 적이 없었다. 늘 이런 저런 출장으로 여행을 하게 되지만 비행기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인터넷은 늘 내 주머니속에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열흘이라는 시간이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일단 ‘까짓거 별일이야 있겠어’라고 생각하며 내 자신을 테스트해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이 없는만큼 가족과 대화할 시간도 많을테니 휴가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기회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마음 한구석은 은근 불안했지만 말이다.

막상 배에 오르고 이틀정도는 별다른 금단 증상 없이 잘 지나갔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습관때문인지 Airplane 모드로 세팅된 아이폰을 보며 이메일과 테크니들, 트위터, 뉴스등이 궁금하긴 했지만 무리없이 휴가에 집중할 수 있었다. 휴가를 떠나기 전에 벌여놓은 일들이 많아서 이런 저런 생각과 잡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지만, 한 이틀동안 이메일을 완전히 끊고나니 둘째날 저녁쯤엔 은근 마음의 평화같은 것도 잠시나마 느꼈다. 이래서 사람들이 unplug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사흘이지나 도착한 첫번째 목적지는 케치칸이라는 작은 마을이였는데 예상과 달리 무선인터넷이 되었다. 그것도 4G! (LTE는 아님). 오오.. AT&T의 커버리지에 은근 감탄하며 신나게 이메일을 다운로드 받고, 뉴스들도 확인하고 막간을 이용해 테크니들 기사도 올리고 그랬다. 도착지에서는 관광 일정이 있으므로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보낼순 없었지만, 틈틈히 아이폰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며 마치 일상의 주말처럼 느껴졌다. 내가 없어도 실리콘 밸리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

금단현상은 그 후에 나타났다. 인터넷이 안되는 배에 다시 오르고 다음 목적지로 가는 동안 좀 답답했다. 다음 목적지에서도 인터넷이 잘 될 것 같은 기대감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혹시 벌써 도착했을까, 인터넷이 되는가 확인해보고 안되면 다시 자고 그러길 반복했다. 알라스카의 주도인 주노(Juneau)에 도착했을때는 LTE까지 빵빵하게 터졌다. 이런 오지(?)에서도 초고속 무선 인터넷이 터져주니 속이 다 후련했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업무 이메일, 개인 이메일등이 쏟아지는데 그중에는 달갑지 않은 소식들도 있었고 내 뜻과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일도 있었다. 스트레스가 확 몰려옴을 피부로 느꼈다. 휴가중에는 웬만하면 이메일 답장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어서 그냥 대부분 모른척 하기로 했는데, 그게 더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표정이 굳어지는 나를 아내는 안쓰럽게 쳐다보고 난 괜찮다고 그러고…흑. 그래도 이곳 저곳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두고온 일들에 대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으니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예 휴가중에는 인터넷을 완전히 끊어버릴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게 또 궁금해 하며 한참을 배에서 지내다가 다음 도착지에서 만난 2G (Edge network) 통신망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2013년 기준으론 용서가 안되는 느림보 인터넷이지만, 이게 어딘가. 스마트폰의 “Loading…”이란 글자와 뱅글뱅글 돌아가는 아이콘을 이렇게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본 적도 없었을거다. 옛날에 자취방 방구석에서 뚜뚜- 소리를 내던 전화선 모뎀으로 PC통신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헐, 벌써 20년전이구나. 결국 급한 사항들은 이메일 답장도 하게 되었고, 심지어 내가 관리하고 있는 테크니들 싸이트의 호스팅업체가 갑자기 서버이전을 해서 웹페이지가 완전히 먹통이 되었는데, 이 문제도 인터넷 접속해서 배가 떠나기 전에 미친듯이(!) 해결해야 했다. 마지막 작업을 하는 중에 배가 움직이기 시작해서 정말 아슬아슬했다 ^^.

마지막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는 날엔 문명의 세계로 돌아온다는 설렘에 새벽 3시부터 잠을 설쳤다. 아직 항구에 도착하지 않은걸 확인하고 다시 잠을 청하기를 반복하다가 5시쯤되니 시그널이 희미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그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이폰을 들고 시그널이 좀 더 강할 것 같은 배의 꼭대기층에 올라갔다. 이정도면 집안의 어딘가에 남아있을 술병을 찾아 헤매는 알콜중독자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꼭대기층 바깥에서 인터넷을 확인하려고 하니 AT&T에서 내 계정 data 서비스를 중단했다는 문자가 왔다. 허걱. 해외에서 갑자기 로밍 데이터를 많이써서 일단 보안상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거였다. 이런 젠장! AT&T가 갑자기 미워졌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날이 밝을때까지 기다려야해서 심퉁거리고 있는 찰라에, 저멀리 동이 트고 있었고 금문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 멋진 광경! 재빨리 아이폰으로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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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광경을 좀 더 잘 보려고 배 앞쪽으로 가보니 5:30의 이른 새벽이지만 카메라를 들고 구경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마 이 시간에 인터넷하러 밖에 나온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몇시간이 지나 배에서 내려 data 서비스 문제를 해결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한손에 아이폰을 들고 각종 이메일과 뉴스등을 LTE로 쭉쭉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광경을 보던 아내가 날더러 데이터를 피속에 주입하고 있는 느낌이냐고 물었다 ^^. 집에 돌아와서는 몇시간동안 온가족이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아이들을 포함, 식구 모두 각자의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들고 밀린(?) 인터넷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난 이미 인터넷 중독자임을 깨달았다. 다음 휴가는 웬만하면 인터넷이 되는 곳으로 갈 것 같다. 아무리 휴가중이라도 하루에 한 두번이라도 확인해 주는게 일주일씩 안보는 것 보단 차라리 맘이 편할 것 같기 때문이다.

동료를 보스처럼, 보스를 동료처럼

예전에 인텔에서 일할 때 있었던 일이다. 그때 나는 회사내의 리더쉽 계발 프로그램에 속해 있었는데, 프로그램 과정중 한달에 한번씩 회사의 높은 사람이 와서 회사 이야기, 커리어 이야기등을 해주면서 자유롭게 질문도 주고 받는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날은 회사의 법무팀을 총괄하는 중역 (General Counsel)이 오는 날이였다. 법률쪽은 내가 생각하는 커리어와 거리가 있으니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날 가장 도움이 되는 말을 들었다. 그분은 (편의상 B 전무님이라 칭함) 미디어 업계 변호사 출신으로, 역시 변호사답게 말도 조리있게 잘 했을 뿐아니라,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여러 흥미있는 주제들로 — 예를 들어 직장에서 포지션 네고하는 법등– 듣고 있던 우리 그룹 모두를 매료시켰다. 그 때 그분이 해 준 커리어 조언중에 특히 와닿은 말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동료를 보스 대하듯 하고, 보스를 동료 대하듯 하라

언듯 잘 이해가 안될 수 있지만, 부연 설명을 듣고나니 정말 그럴 듯 했다.

1) 동료를 보스처럼 우대하기: 일을 하다보면 상사로부터 받는 일도 많지만, 같은 그룹의 동료가 부탁하는 일이나, 같은 레벨의 다른 조직에 있는 사람이 부탁하는 일도 많기 마련이다. B전무님의 조언은 이런 수평적 관계를 중요시하고 그들을 보스 챙기듯이 하라는 것이다. 수평적인 관계이니 누가 누구에게 ‘지시’할 수는 없고 보통 ‘부탁’을 하게 되는데, 늘 마음 한 구석에 ‘저 사람이 이걸 성의있게 해줄까?’라는 의구심이 조금씩 있기 마련이다. 이런때 그 일을 정말 정성스럽게 챙겨서 해주면, 받는 사람의 감동은 그만큼 커지기 마련이다. 이런 조그만 감동이 쌓여서 그사람의 명성 (reputation)이 되고, 이런 명성이 커리어 상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2) 보스를 동료 대하듯 하기: 이말은 상사와 격의 없이 일을 논하고 나누어서 할 수 있는 사이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이다. 즉, 상사에게 일을 지시받기만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그 상사의 입장에서 어떤 일이 도움이 될까 미리 생각해서 실천하고, 상사의 고민과 숙제를 가까이서 듣고 ‘같이’ 해결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이런 관계가 형성되면 상사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등의 이유로 기회가 생길때 그 상사의 추천을 받을수 밖에 없다. “이 사람은 직급상으론 내 밑에서 일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내 업무의 반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추천만큼 강력한 것도 드물테니 말이다. 물론 상명하복/위계질서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스들도 있지만, 보스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문제를 같이 공감하며 해결해 가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든든할 수 밖에 없다.

글로 옮기고 보니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같이 좀 당연(?)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동료를 보스 대하듯 하고, 보스를 동료 대하듯 한다는게 말은 쉬워도 실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위의 조언을 해준 B 전무님은 내가 인텔에 있는 동안 애플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도 같은 직책을 맡으셨으니 그 분 직속상관은 스티브 잡스였을 것이다. 가끔 그분은 스티브 잡스를 ‘동료처럼’ 대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

미국 회사 직급 체계 이해하기

벌써 오래전 일이다. 미국 대기업에 다니던 때였는데 나는 미국 본사 소속으로 한국일은 관여하지 않던 시절이였다. 여름에 가족과 한국에 방문한 틈을 타서 한국 지사에서 근무하시는 어떤분을 찾아 뵙기로 했다. 이전에 미국에서 한번 뵙고 인사한적이 있는 분으로, 그 분과 직접 같이 하는 일은 없었지만, 큰 범위에서 같은 조직이고 한국 분이시고 하니 그저 한국에 간김에 찾아뵙고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다.  나보다 연배는 아마 적어도 6-7년 정도는 더 높은 분이고, 영문 타이틀은 Senior Director 였다. 한국 대기업에선 부장쯤 된다고 보면 된다. 시간에 맞춰 그분 오피스를 갔는데, 현관에서 나를 맞아준 직원이 그분한데 가서 “전무님, 손님 오셨는데요” 그러는거다. 겉으로 내색은 안했지만, 나는 순간 속으로는 ‘전무? 이 아저씨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스쳤다. 나는 대기업 전무라는 타이틀은 중견급 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분이 정확히 어떤 레벨에 있는 분인지 아주 잘 알고 있던 터라 좀 황당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미국 본사에서는 한국 지사에서 한국말 직함을 뭐라고 부르던 거의 신경을 안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차피 직함이라는게 딱 맞게 번역하기도 어렵기도 해서 그런지 보통 현지 직원들이 알아서 하게 놔두는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한국 지사는 미국에서 보기에 작은 조직이므로, 본사에서 현지 언어의 직급/직함까지 꼼꼼하게 챙기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께도 이런 틈을 타서 위와 같은 직급 뻥튀기가 너무 비일비재 한 것 또한 현실이다. 미국 본사 기준으로 ‘Senior Manager’ 급이, 한국 명함으론 ‘상무’로 둔갑하는 경우도 허다하니, 양쪽 문화를 알고 있는 내가 보기엔 좀 어이가 없다.

먼저 미국 회사 직급 체계를 한번 살펴보자. 물론 회사마다 다르므로 일반화의 오류가 많겠지만, 내가 경험하고 본 것을 토대로 보면 아래와 같다.

  • CEO – 대표이사 혹은 사장
  • Executive Vice President 혹은 Senior Vice President – CEO에 바로 리포트 하는 자리로 보통 회사의 큰 조직 하나씩 맡고 있다. 부사장 혹은 전무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CFO 같이 C로 시작하는 자리도 보통 이급에 속한다. 본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정도 레벨이면 리더쉽, 소프트스킬, 인맥, 정치적 능력이 다 수준급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 Vice President – 보통 EVP나 SVP에 리포트 하며 보통 중규모 조직을 관할한다. 상무쯤으로 이해해도 되고, 이레벨 부터 임원 (executive)이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다. 특정 프로덕트 라인에 P&L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General Manager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세일즈로 보면 아태지역 총괄하는 사람 정도가 될 수 있다. 내부적인 웬만한 결정은 할 수 있지만, 외부와 맺는 협약같은 결정은 역시 위로 올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 Senior Director 혹은 Director – 보통 VP에게 리포트 하며 ‘팀’이라 불릴수 있는 소규모 조직을 맡거나 경우에 따라 조직 없이 혼자인 경우도 있다. 이사나 부장쯤이라고 보면 대충 맞다. 중간레벨 관리자로서 아래 사람도 챙겨야 하고, 밖에 나가서 뛰기도 해야하며, 승진을 바란다면 윗선도 챙겨야 한다. 보통 큰 정치적 능력 없어도 이정도 레벨까지는 꾸준한 노력이면 가능하다.
  • Senior Manager 혹은 Manager – 한국에서 차장, 과장쯤이 이에 해당하지 않나 싶다. 예외적으로 VP레벨에 리포트할수도 있지만, 보통 Director가 관할하는 팀에 소속된다. 팀 내에서는 실무에 대한 경험이 많은 편이므로 신입 사원이나 경력이 몇년 안된 직원들 업무를 교육하거나 도와주는 ‘사수’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인사적인 책임은 보통 없다. 즉 people manager가 아닌 individual contributor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 Staff, Engineer, 혹은 Analyst 등 – 대학 갓 졸업한 신입 사원이나, 경력이 몇년 안된 사원으로 junior 레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위에서 나열한 계층은 회사의 규모나 문화에 따라 많이 다르다. 대기업의 경우 CEO에서 맨 아래까지 7레벨은 쉽게 된다고 봐도 좋다. 스타트업은 당연히 레벨 수가 적다 (보통 3레벨 정도).

미국 회사에서 온 누군가의 명함만을 보고 어떤 레벨인지 가늠하기 힘들다면 위의 리스트를 참고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애매하다면 당사자에게 ‘당신은 누구에게 리포트 하십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도 그렇게 큰 실례는 아니다. 그 사람 보스의 타이틀을 보고 대충 상대방이 어떤 직급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단, CEO에게 ‘당신은 누구에게 리포트 하냐?’고 물어보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니 조심하시길 ^^)

혹자는 이런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오피스의 우두머리가 본사에서는 Director 레벨이라고 할때, 지사의 우두머리는 ‘사장’이라 부르니 그 밑의 매니저 급은 ‘전무’ 혹은 ‘상무’가 되는게 당연한것 아니냐고. 뭐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한데, 경우에 따라서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야후 재팬을 예로 들어보자. 내 기억에 야후 재팬은 아마 야후와 일본의 소프트뱅크가 합작으로 만든 것이고, 거의 독립적으로 운영된다고 들었다. 이런 경우 “야후 재팬”이라는 조직내에서 사장, 전무, 상무로 쭉 직급이 나가는건 별 문제 없는 것 같다. 야후 본사가 아닌 야후 재팬이니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 진출한 대부분의 미국 회사는 그냥 한국에 세일즈/마케팅 오피스가 있는 것이다. 물론 법/세금 문제등으로 한국 법인은 만들었겠지만, 그렇다고 이게 독립적인 개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직원 10명을 둔 세일즈 오피스가 있는 것과, 진정한 의미의 “지사”가 있는 것이랑은 좀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10명짜리 세일즈 오피스만 관리하고 있으면 ‘사장’이고 그 아래서 일하는 평직원에 가까운 이들이 ‘전무’ 혹은 ‘상무’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걸 보게 되면 실소가 나오기도 한다. 물론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관습을 따르게 된 사람도 많겠지만, 보통 있어보이는 타이틀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으니 이런 웃지 못할 일이 계속 이어지게 되는것 같다.

쉬어가는 포스트 (사진 몇 장)

미국 노동절 공휴일 (Labor Day)을 맞아 가족과 몬터레이 바닷가에 놀러와서 사진을 몇장 찍어봤는데 맘에 들게 나온 사진이 있어 올려봅니다. 저는 사실 수동 사진도 잘 못찍는 초보인데 사진기에 내장된 특수효과 (필터) 덕에 이런 사진도 얻는 군요. 인스타그램을 쓰면 누구나 사진예술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듯이 ㅎㅎ